자살자의 유족을 생각하라

자살자의 유족을 생각하라

[ 기고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0월 21일(목) 10:14

 
"아무개 아무개가 자살하였다"는 소식이 너무 자주 들려온다. 슬픈 일이다. 일전에도 유명 방송인이 자살하였고 그의 남편도 홀로 보낼 수 없어서 같이 갔다는 열부전도 전해왔다. 안타깝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그렇게 갔을까. 크게 놀랄 일인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이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매일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은 그들은 무명인들이기 때문에 역시 소식 없이 묻혀져 갔다. 그러는 중에 이름난 사람들도 줄줄이 그 길을 따라갔다. 유명 연예인이나 실업인들을 넘어서 대통령을 지낸 분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여 멀어져 갔으니 이제 이런 일로 하여 크게 놀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더욱이 힘들지 않은 것은 기독교 신자들도 자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놀라기 보다는 일상처럼 생각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자살에 대해서 종종 논객들의 의견이 지상에 올라오곤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각계각층이 방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일간신문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 그보다 더 관심 있게 보고 소리를 내는 곳은 교계이고 역시 교계의 신문이다. 일반신문에는 죽음의 방지책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교계의 신문에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죽은 이후의 상태까지 거론하면서 더 힘들게 만든다. 그렇게 죽었으니 죽은 후에도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은 자 앞에서 그리고 그 유족 앞에서 그런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말은 삼가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하고자 할 뿐이다. 물론 자살을 결코 방조할 수 없다는 뜻에서 대못을 박아 두자는 의미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①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죽었으니 영원히 지옥에 머물게 되는 것이라는 단정적인 말은 없다. 우리가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가룟 유다의 죽음(마27:5)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는 예수님 해치고 나서 죽었으니 그가 갈 곳이야 뻔하다 그러나 그의 동료였던 베드로는 그가 간 곳을 지옥이라 말하지 않고 "제 곳으로 갔다"(행1:25)는 말로 대신 했다. 그의 자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옥행이 분명한 것이겠지만 말은 매우 부드럽게 하였다. 차마 직언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인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남을 해치고 자살하는 경우도 혹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고 오히려 남에게 해를 받고 죽거나 오직 자신만의 문제로 아파하다가 죽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다. 천국 지옥행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동정의 여지는 있다는 뜻이다.

② 그렇게 가슴 아프게 보면 가족들을 생각해 줘야겠다는 것이다. 형제자매, 자녀들과 그리고 부모의 참척(慘慽)한 심정을 헤아려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그 아픈 유족들의 가슴에 내세의 희망마저 잘라버리는 선언을 굳이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다른 어느 종교가 이렇게 이중상처를 주는 곳이 있는가. 거기 가서 당할망정 여기서부터 서둘러서 이중절망을 안겨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니 잘못은 크지만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보자"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다. 들어주실지 안 들어주실지는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런 기도했다고 하나님이 야단이야 치시겠는가. 혹여 야단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해 보아야 할 기도다. 상처 입은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우리의 도리가 아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지만 믿는 자들이 종종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벌 받아서) 심술궂은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어서 안타깝다. 생(生)은 명령(命)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박병윤
목사ㆍ광주충광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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