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라보는 세 가지 눈

인생을 바라보는 세 가지 눈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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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2일(화) 20:02

버나드 쇼(Bernard Shaw)란 극작가는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절반쯤 들어있는 포도주 병을 바라보는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는데, 한 종류의 사람은 비어있는 위의 절반을 보면서 "벌써 절반이나 비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을 그는 '수동적 사람(Pessimist)'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아래의 채워져 있는 절반을 보면서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을 그는 '능동적 사람(Optimist)'이라고 불렀다.

수동적 사람은 염세적 인생관을 가지기가 쉽다. '인생무상이다. 모든 것이 다 헛되다'며 세상을 어둡게만 보게 된다. 반면 능동적 사람은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이 있겠지 뭐, 고진감래(苦盡甘來) 아닌가?"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낙관적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막연한 것일 뿐이다. 우리의 삶에 고(苦)를 당할 때마다 반드시 감래(甘來)하는 법은 없지 아니한가.

새가 지저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고 말한다. 사실 새가 우는지 웃는지 누가 알겠는가? 제 소리를 제 마음대로 내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듣고 보는 우리 인간의 자기 마음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3의 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병의 비어 있는 윗부분만 보지도 않고, 또한 채워져 있는 아랫부분만 보지도 아니한다. 그 눈은 항상 두 부분을 동시에 함께 보는 것이다. 바로 우리 믿는 자가 가지는 눈이 이러한 눈이다.

물론 이 눈으로 보는 자는 현재의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고통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고통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경륜 안에 있음을 또한 본다. 그래서 그 약속을 믿은 결과로, 또한 그 약속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고난에도 낙망하지 않으며, 또 허망한 낙관주의에 빠져 방탕하지도 아니 한다.

이렇게 세 가지의 눈을 비교해 보았을 때, 앞의 두 눈은 결국 같은 것이다. 바로 인간의 '소원'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원의 성취를 밝게 보면 낙천적, 어둡게 보면 염세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의 눈은 '인간의 소원'이 아니라 '소망'에 근거한 것이다. 소망과 소원은 다른 것이다. 소원이란 '내 욕구―나의 끝없는 욕심'에 근거하여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믿음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소망이란 결국 우리 인간의 욕심에 근거한 '소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이루어진다는 아무런 보장이란 없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 이루어짐의 결과를 미리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기에 항상 인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에 매여 허덕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우리 인간이 '소원의 사람이 되느냐?' 또는 '소망의 사람이 되느냐?' ―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김서년 / 목사 ㆍ 벧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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