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인가, 저주인가

경배인가, 저주인가

[ 생명의양식(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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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06일(수) 10:24

▶ 본문 : 욥 2 : 7~10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범적인 전형을 들라면, 반드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 욥입니다. 욥기 1장 8절과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욥을 이 세상사람 같지 않다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나, 정직하게 돈 버는 것에 있어서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경건함은 물론이고, 자녀들이 염려되어서 죄를 짓기 전에 미리 앞질러서 제사를 드리는 철저함을 보인 사람이 욥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고난이 찾아오다가도 비껴가야 할텐데, 그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온 몸이 종기로 뒤덮였습니다. 가려움증은 사람의 넋을 빼앗아 갑니다. 당장 죽지는 않지만, 지독한 고통 때문에 앞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만들지요. 욥의 상황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런 욥 앞에 아내가 나타납니다. 그녀의 역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욥에게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욥의 아내는 다짜고짜로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바레크 엘로힘 바무트, 9절)고 윽박지릅니다. 번역대로라면, 욥의 꼬락서니가 정말로 한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하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가 원래는 '경배하다' 또는 '송축하다'는 뜻을 가진 '바라크'에서 온 것임을 알고 놀랍니다. 문자대로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죽으라"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욥의 처지를 보고 아내가 완곡어법을 사용해서 남편을 비꼬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좋으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죽으라"는 말은 신랄한 욕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앞에서 쉽게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죄책감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고난을 당할 때에 두 가지 모습이 다 적절한 반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처음 교훈은 고난을 당할 때에 이유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유를 찾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손가락 끝에 내가 걸리면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손가락이 하나님을 향하면, 그 분을 원망하게 되지요.

노벨상을 받은 랍비 쿠쉬너(H. Kushner)는 고난의 시간에 이유를 찾는 대신 우리를 고통에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들이 생기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우리 안에 무슨 선한 것이 남아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오염시켰습니다. 아담 이후의 삶은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지요. 그 속에서 우리가 살기 때문에 내가 굳이 지금 개인적인 잘못을 범하지 않아도 망가진 세상이 주는 고통은 얼마든지 삶 속에서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단절이 결국 의도하지 않은 '나'라는 피해자를 만든 셈이지요. 그러니 '나'는 피해자이지만, '우리'는 가해자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인생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쉽게 개인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삶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원망해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잘못을 범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처신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또 다른 해석이 고난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바른 길을 보여줍니다.

엥그와(K. Ngwa, 드류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는 9절의 '바라크'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지금까지 해온 대로 신앙적 뚝심을 지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다가 죽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에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은 10절에서 그런 아내를 향해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한 것은 좋지만, "죽으라"고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는 욥의 신앙을 인정하기는 해도 여전히 삶에 대한 회의와 불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면, 죽을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이어서 하나님이 복과 화를 관장하시는 주권자이심을 천명합니다. 고난 앞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내게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내 삶의 여건이 좋든지 고약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결국 욥기의 가르침은 우리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풍성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며, 풍성한 삶은 상황과 관계없이 기뻐하는 삶입니다. 그런 기쁨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에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없을 수는 없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은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죄책감을 가지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그 분을 경배합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김세권목사 / 문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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