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작'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1>'시작'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 창조과학칼럼 ] 이재만선교사의 창조과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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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12일(목) 10:40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ㆍ강원대 지질학 석사
그랜드 래피즈 신학교 구약학 석사

   
성경에는 수많은 '시작(origins)'이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부분이 다른 고문서들과 구별되는 성경의 아주 독특한 부분이다. 우주의 시작, 지구의 시작, 동식물의 시작, 인간의 시작 등….

"태초에"로 시작하는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시작에 대해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써 내려간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독자들의 의견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설적이다.

이런 자세는 창세기 1장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일관된 자세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6).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11)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막 10:6).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고전 11:8). 이처럼 거침 없이 선언한다. 오히려 그 창조자는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 알려는 자세를 꾸짖기도 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깨달아 알았으면 말할지니라"(욥 38:4).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욥 38:12). 이와 같이 창조에 관하여는 그 자리에 없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거기 계셨던 창조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에서 취하는 자세이다.

더구나 성경은 단지 시작에 관한 것만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그 이후에 일어난 타락, 홍수 심판, 바벨탑, 그리고 그 이후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들, 즉 창조자와 인간이 함께 경험했던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주위의 모습, 지역 이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도 꼼꼼하게 나열된 족보에 나이까지 적혀있다. 이것은 성경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창조자의 일방적인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 속에 우리의 행한 일 때문에 하신 명령들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경 기자들은 이 역사적 기록을 변할 수 없는 사실로 전제하고 써 내려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이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서는 성경의 창조기록뿐 아니라 그 후에 일어난 역사기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는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교육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식의 진화론적 역사를 사실로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성경을 의심하고 있다. 그 의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교인들도 세상과 동일하게 세상에서 진화론적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교육받은 무의식적인 상태로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진화의 반대는 유신론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진화론을 믿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진화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의 순서로 창조하셨다고도 말한다. 모두가 수십억 년의 진화 순서를 사실로 전제하며 창세기 기록을 변형시킨 것들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하나님'과 '창조'란 단어는 사용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분이 계시한 성경의 역사는 사실이 아니어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타협이론들을 만든 자신은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이들 이론을 받아들였을 때 기존에 기독교 국가였던 유럽이나 미국에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잡지 못했다. 결국 성경기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이 꼭 기록된 대로 역사적 사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도 교회 안팎에서 볼 때는 여전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교회에 사람을 남겨놓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외부 사람들을 안으로 이끌지도 못했다. 이 자세도 결국은 성경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진화의 반대는 유신론이 아니라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함께 드러내신 능력과 성품, 바로 그분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경이 곧 진화의 반대다. 크리스찬에게 수십억 년의 진화론 문제가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진화를 믿지만 성경도 같이 믿을 수 있어" "수십억 년의 진화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아직도 그 심각성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세를 가졌을 때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의심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무서운 열매를 거두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8, 20). 그 열매만 보더라도 그 심각성은 이미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성서 변증에 있어서 이 수십억 년의 진화론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서 이 '시작'에 대한 문제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증거(science), 성경적 기록(scripture), 사회적 열매(society) 모두를 고려하며 어떤 것이 바른 '시작'에 관한 모델인지 접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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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부터 이재만선교사의 '창조과학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선교사는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으로 미국 그랜드 캐년을 중심으로 한 창조과학 탐사여행을 1백50회 이상 이끌었으며 저서로 '창조과학 콘서트'(두란노)와 '노아홍수 콘서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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