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랑으로 산화한 젊은이, 윌리엄 쇼 대위

한국 사랑으로 산화한 젊은이, 윌리엄 쇼 대위

[ 교계 ] 서위렴 선교사 외아들로 평양서 태어나, 6ㆍ25 전쟁서 전사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0년 06월 22일(화) 18:30
   
▲ 지난 22일 은평평화공원에서 열린 윌리엄 쇼 대위의 동상제막식.
6ㆍ25 전쟁이 일어난지 60년이 흘렀다.
최근 전쟁 영화나 드라마는 참전용사의 고증을 근거로 더 사실적인 묘사에 비중을 둔다. 우리는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 가족애, 연민을 통해 이들도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난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는 뜻깊은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1950년 9월 22일, 당시 녹번리였던 이 지역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는 일제강점기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한국명 서위렴)의 외아들로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학업을 마치고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국내에 들어와 해군사관학교 등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다시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태어나서 20년 가까이 함께 했던 한국인들과 가르쳤던 생도들에 대한 사랑이 마음을 흔들었던 그는 결국 가족과 마치지 못한 학업을 뒤로하고 자원입대를 한다.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지형에 익숙했던 그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을 도와 인천상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해군으로서 큰 공을 세웠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해병대로 자원해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9월 22일 아침, 적 후방 정찰을 목적으로 녹번리에 들어선 그는 매복해 있던 분한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사했다. 그의 나이는 29세였으며 서울 탈환을 한 주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서울 탈환 후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이번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양화진에 있는 묘비에는 요한복음 15장 13절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구가 쓰여 있다. 그는 이 말씀을 읽고 참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기념비는 전사 6주기인 1956년 가족과 지인들이 모은 성금을 통해 그가 전사한 자리에 세워졌다가 이후 도시계획에 밀려 응암동 어린이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번에 새로 조성된 은평평화공원에 이전 설치됐다.

이날 제막식에는 쇼 대위의 큰 며느리인 캐럴(Carole Cameron Shaw) 여사를 비롯해 두 명의 손자 윌리엄(William)과 데이비드(David), 그리고 둘째 아들 스티븐(Stephen Richard Shaw)과 부인 및 참전용사 등 총 9명이 참석했다.

당시 쇼 대위를 포함한 정찰대는 적과 오랜 시간 교전했으며,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총알에 맞아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은평구청(구청장:노재동)은 "쇼 대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증언을 위해 구조에 동참했던 미군들의 행방을 국방부와 해군본부, 미 해병대 사령부의 도움으로 수소문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 동상 제막 행사에 참석한 유족과 군 관계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6ㆍ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2만5천여 명에 달한다. 살아서 돌아간 병사들도 이제 대부분 생존해 있지 않다. 60년 전 일어난 일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작은 감사가 모여 공원과 동상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제 자신의 연약함을 이겨낸 쇼 대위의 한국 사랑은 오랫 동안 우리 이웃들 곁에 남아 있게 됐다.
  echa@pck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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