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한경직목사 별세 10주기

특별기고 / 한경직목사 별세 10주기

[ 기고 ] 한경직목사님과 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4월 15일(목) 10:07

 
내가 한경직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취미도 없는 법과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집을 떠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침내는 아버지에게 불효를 하더라도 신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한국교회에서 가장 고명하신 어른이 한경직목사님이신 것을 알고 감히(?) 혼자서 영락교회로 한경직목사님을 뵈러 찾아간 것이다. 큰 절로 인사를 드린 후, 나의 신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나와 같이 불신가정에서 자라 대학공부도 법과를 한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여쭈었더니 루터도 법학을 공부했고 칼빈도 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격려해주셨다.
 
한경직목사님과의 두 번째 특별한 관계는 장신대 교수로 있을 때 한 목사님이 오랫동안 한국 프린스턴신학교 동문회장을 맡으셨는데 내가 그 총무를 맡은 관계에서였다. 프린스턴신학교 총장이 방한할 때 환영행사를 하는 것 등으로 자리를 같이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고 장신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한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남한산성에 계실 때, 해마다 양력 설에는 장신대 교수 여러 사람이 함께 세배를 하러 가는 것이 하나의 연례행사로 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장신대 대학원장으로 재임시의 일이다. 장신대가 처음으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되었을때 그 심위위원회 위원장(대학원장 당연직)인 내가 회의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인사와 외국인을 각각 1인씩 정하기로 할 때에 국내 인사로는 한경직목사, 외국인사로는 마포삼락목사(전 장신대 협동학장)에게 드리기로 결정을 하고 내가 그 결정사항을 알리고 수락을 받으러 남한산성 사저로 갔던 일이었다. 그러나 한경직목사님은 장신대 대학원의 결의에 대하여 그 제의를 수락하지 아니하시고 극구 사양하셔서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네 번째 경우는 한경직목사님께서 1992년 8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셨을 때 그 축하예배가 63빌딩에서 열렸는데 내가 한국 프린스턴신학교 동문회 총무로서 축하패를 만들어 축하의 뜻을 전한 것이었다. 그날 예배에서 인사말씀을 하신 한 목사님은 한 가지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은 그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말씀이었다. 당시 갑작스런 고백에 대하여는 두 가지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그 하나는 한 목사님께서 자신의 그러한 과오를 솔직하게 공중 앞에 고백하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는 것과 다른 한 면은 한 목사님의 그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고 하는 말이었다.
 
다섯 번째는 내가 한경직목사님의 양력 생신을 알려 드려서 한 목사님께서 크게 기뻐하신 일이다. 한 목사님의 생신은 공식적으로 주민등록증에는 1902년 12월 29일로 되어있어 영락교회에서는 해마다 음력인 그날을 생일이 알고 축하를 해왔는데 내가 양력으로 정확한 생일인 1903년 1월 27일인 것을 만년력에서 찾아서 알려 드리니 매우 기뻐하시면서 "내가 이제야 진짜 생일을 찾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맞이하신 이듬해 생신은 영락교회에서 처음으로 양력생일 날에 축하연을 해드렸는데 그때 이영헌목사님(한 목사님 사위로서 나에게는 장신대 은사다)께서 나에게 그 뜻깊은 생일에 함께 참여하도록 전화로 연락을 하셨으나 미국에 가있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한 목사님께서 이 생일 변경의 사실을 친필로 쓰셔서 나에게 주셨는데 거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생일. 음력 1902년 12월 29일, 임인년. 양력 1903년 1월 27일 계묘년. 단기 4236. 범띠(음력), 토끼띠(양력). 장로회신학대학 교수 나채운박사(조사)."

나채운목사ㆍ전 장신대 교수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