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2월 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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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28일(목) 16:50

월-거룩하게 삽시다
본문: 벧전 1:13-17
찬송가: 540장(구 219장)

조선왕조 제25대 왕인 철종은 본래 강화도에서 천하고 가난하게 살던 왕족이었는데 24대 왕인 헌종이 후손이 없이 죽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왕이 된 매우 특별한 경우이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던 멸망의 자식들이었으나 예수님으로 인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이전의 부끄러운 모습을 버리고 본문의 말씀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레위기 19장 2절에서 말씀하기를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전에 대통령의 아들들이 구별된 삶을 살지 않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므로 그들의 아비 된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는데, 자녀된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신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부분이 안되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 기독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은데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성도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고,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해야한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며 부끄러움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 된 저희들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 인 채 목사
동해교회 시무

 


 

화-닭 울음소리
본문: 마 26:31-34, 75
찬송가: 290장(구 412장)

여기는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 이 공항의 남성 화장실 청소담당 직원은 새어나오는 소변 때문에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아무리 경고문을 붙이고 협조를 당부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다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소변기에 파리 모양 스티커를 붙여놓는 것이었다. 결과는? 소변기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변량을 무려 80퍼센트나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물론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라는 경고의 말이나, 심지어 파리를 겨냥하라는 부탁조차 없었지만 남성 행동의 적절한 이해(?)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행위를 유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넛지(Nudge)라고 한다. 다소 생소한 이 단어는 어떻게 하면 강박이나 강요 혹은 억압이나 인센티브 없이 '부드러운 개입'으로 가장 이상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겠냐를 연구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만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할 것"라고 경고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실력을 한껏 과신하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하자 여지없이 예수님을 부인한다. 그 때, 곧 닭이 울었다(27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혼내시거나 공포에 떨게 하지 않으신다.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들려주시므로 베드로 자신을 알게 하신다. 어쩌면 엎드려 절받기 하시는 주님이시다.
 
혹 나에게 그 닭 울음소리는 없는지? 우리 집에 울려 퍼지는 새벽닭 울음소리는 없는지 살펴보자.

오늘의 기도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공포에 떨게 하지 않으시려고 부드럽고 자애롭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닭 울음소리에도 깨어 경성할 수 있는 부드러움에 지배당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철 민 목사
대전제일교회 시무

 


 

수-종말론적 신앙으로 살라
본문: 약 4:13-17
찬송가: 176장(구 163장)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엡스키(F.M.Dostoevskil, 1821-1881)는 그의 나이 28세에 페트라셰스키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회원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전에 집행관은 도스토엡스키에게 3분간의 시간을 주었다. 그는 금싸라기 같은 3분을 이렇게 쓰기로 작정하였다. 1분은 어려서부터 뛰어 놀고 활동하던 자연산천을 돌아보고, 1분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마지막 1분은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는 계획대로 1분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돌아보았다. 1분은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남은 1분을 보내면서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후회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정신이 아찔해 졌다. 잠시후 사형집행관의 "장전!" 하는 소리에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이 임박해 왔다. 그런데 그때 백마를 탄 사람이 나타나 "황제 특사요! 사형집행을 중지하시요"라고 외쳤다. 그는 죽기 일보직전에 사형을 모면하게 되었고, 평생을 그 순간을 생각하며, 겸손히 살았다고 한다.
 
우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것과 저것을 하겠다는 우리의 계획과 욕망도 다 허탄한 것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 같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겸비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도록 하자.

오늘의 기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시여! 제가 저의 생명의 유한함을 깨닫고, 오늘이 마지막날인 것처럼 종말론적 신앙으로 겸비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 창 영 목사
개봉교회 시무

 


 

목-다른 이를 복되게 한 사람
본문: 창 39:1-5
찬송가: 428장(구 488장)

요셉은 친 어머니를 일찍 여윈 가운데 열 명의 이복형들 틈에서 시기 질투 갈등 속에 자라난 사람이다. 그는 결국 이복형들에 의해 인신매매 되어 타향 만리 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간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시련을 이겨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 간 사람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고난의 환경을 딛고 승리하는 인생으로 우뚝 서게 되었을까?
 
요셉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한 사람이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에도 주인을 복되게 하였기에 주인이 그를 신임하게 되었고, 감옥에서도 자기를 희생하며 주위 사람들을 복되게 하였기에 간수장이 그에게 감옥의 죄수와 제반 사무를 맡겼던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덩어리로 산 것이다. 요셉으로 인하여 주변은 형통하게 되었다.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하며 살았다.
 
통로의 역할은 그저 열려있으면 된다. 화려하거나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열려있고,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열려있으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만 전달하면 나도 복되고, 주변도 복되게 된다.
 
우리도 오늘 사랑과 복음 들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세상으로 나가 주님을 알리고, 나도 복되며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통로가 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 세계는 지진과 기근, 죄악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을 복음으로 복되게 하는 믿음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 현 대 목사
주내교회 시무

 


 

금-이별, 그 이후
본문: 창 23:1-9
찬송가: 494장(구 188장)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애통했다는 말이 이 말씀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슬픔 속에 가라앉아 있지 않았다.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말씀은 슬픔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주검 앞에서 슬픔을 떨치고 일어났다. 죽음은 한 사람의 존재를 현재에서 과거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산 자는 과거의 잔해를 떨치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죽음은 떠남이 아니라 귀향이다. 또 죽음은 해방이다. 육체적인 제한과 세상에의 얽매임을 풀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아날루시스'라고 표현했다(딤후 4:6).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를 알면 범인(凡人)이라도 슬픔에 침잠하지 않고 현실을 긍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하고도 당당한 삶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방인이면서도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떳떳하고 당당했던가? 믿는 이는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면 안 된다. 곧은 믿음으로 바르게 살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를 꺼리면서도 존중하고 따르게 마련이다. 세상이 함부로 대하는 것은 믿는 우리의 삶이 깨끗하고 반듯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모할 영원한 본향에서의 삶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영원을 위해 오늘을 투자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이 땅의 욕심에 매어 받은 인생을 탕진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영원을 향한 투자가 되게 하시고, 때로 슬픔을 당하더라도 이겨내고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바꿔갈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 석 연 목사
서원경교회 시무


토-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
본문: 눅 16:1-13
찬송가: 208장(구 246장)

불의한 청지기란 오늘로 치면 부동산, 금, 그리고 주식의 황금분할을 잘 하여 투자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상 사람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자기 미래를 준비하는데, 우리 빛의 자녀들은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오늘 말씀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실제 이 말씀을 했을 때 듣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에 대해 오늘 말씀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이라 하였다. 그렇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하나로 통한다. 거기에 종교까지 곁들여 이 세상의 죄를 용서 받는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이 천국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다. 주님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부자고,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다. 가진 것 없어도 그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용서와 평화와 감사를 나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부자인 것이다. 재산이 많고 적은 것이 논쟁거리가 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 베푸신 것을 나누고 있느냐는 것이다.
 
왜 부자가 표면상 죄가 없는데 지옥에 갔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의 재물을 한 껏 누릴 때, 그 부자의 집 문 앞에 병들어 죽어가는 나사로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아도 나누는 것은 그저 단순히 적선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수준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장 중요시 하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나누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나누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오늘의 기도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이 자기 생명 까지도 내어놓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았으니,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나에게 주신 것 을 나누어 살며 구원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 홍 택 목사
고기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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