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전향한 자로 살리라"

"하나님께로 전향한 자로 살리라"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41)칼빈의 성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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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03일(목) 10:08
유정우 / 전 평택대 교수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한국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큰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민족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자랑스러운 교회이다. 그러나 그만큼 책임도 크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복음 교리와 교회의 가르침에 혼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 진리에 혼동이 왔다. 그 이유는 교회성장주의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결과적이라야 한다. 인생의 성공이 복음이고 세상적 성공이 믿음이라는 등식의 성공신학, 번영신학을 전파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은 혼동에 빠져있다. 과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교회가 세상과 같이 물질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요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의 성도를 빼앗아가기 위해 이단적 교리로 차별성을 강조한다. 어떤 목회자는 큰 운동장에서 대형집회를 열어 율법폐기론을 가르치면서 교회의 양무리를 도둑질하고 또 어떤 사이비 목사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집단만 의롭고 기성 교회는 모두 다 썩었고 바리새인 집단이라고 몰아가면서 그들만이 마지막 남은 의인들이며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현혹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또 어떤 목회자는 갈라디안 주의를 가르치면서 구원은 은혜로 받고 천국은 율법을 지켜서 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교회지도자들이 교리를 혼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위기에 있다.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공부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유혹받기 때문에 번영신학이나 또는 신학에 무지하여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 또는 갈라디안주의에 빠지는 것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복음 교리의 바른 이해와 그 가르침에 주의해야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세웠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이 '이신칭의'교리에 의해 시작되었고 죄용서 교리가 그만큼 중요하게 가르쳐졌기 때문에 종교개혁 제2세대인 칼빈은 성화 교리를 세우게 된다. 물론 칭의 교리는 한 교회가 넘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교리이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 원리 하나만 강조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다른 중요한 교리'가 잠식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완성한 자라면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장로교인이 될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교도들의 조롱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영예를 드높이려면 번영신학이나 그릇된 교리 및 사상에서 벗어나 바른 신학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이단교리를 전파하는 군소 교단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인가?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물론 성령의 역사이고 믿음의 열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용서와 회개의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 용서와 회개는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동시에 분리되지 않는 은혜들이란 점이다. 

복음 교리가 잘못 전파되는 이유는 이 이중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는데서 기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받고 이 은혜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잘못 이해하므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 없이 혼동하고 또는 칭의만 강조하고 또는 칭의와 분리시켜 성화만 강조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나는 한국교회가 부흥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만큼 교회지도자들의 복음 교리의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용서의 복을 받는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회개의 복을 받는데 이 회개는 은혜의 역사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개이다. 이 회개를 칼빈은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은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칭의(죄용서)가 하나님의 은혜이면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이다. 회개가 믿음의 열매이지만 이 순서는 논리적 순서이고 사실의 순서는 아니다.(요 1:13절 주석참조) 어쨌든 죄용서와 회개의 복을 동시에 받는 것을 칼빈의 성화론이라고 하며 이는 회개에 대한 교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이다.

개혁교회(장로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싸구려 은혜'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이고 이것이 교회의 적이다. 그러면 칼빈의 성화론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일생동안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회개의 삶이다. 평생 동안 우리는 육을 죽이기 위해 육과 투쟁해야 한다. 이 싸움에는 중생한 사람만이 설 수 있고 궁극적 승리를 성령이 보장해주는 싸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생에서 이루어지지는 않고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하실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에 대해 가르친 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육을 죽이기 위해선,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주를 따르고, 셋째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와 둘째가 모두 셋째에 관계되기 때문에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삶(성화론)은 하늘나라 소망의 차원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을 죽이는 일에서 행위 없는 믿음을 상상도 하지 않는다.

왜 육을 죽여야 하는가? 영이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회개가 하나님에게 전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에게 전향해야 한다. 둘째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기 때문에 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의 첫째 요소 '자기부인'과 둘째 요소 '십자가를 지는 일'은 하늘나라를 소망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늘나라를 명상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것을 너무 좋아하고 여기에 소망을 두고 모든 것을 여기에 걸고 있다.

우리의 나그네 생활은 언젠가 종식된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여전히 죄의 권세와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싸움을 하면서 천국 가는 나그네로 산다. 우리는 죄책에서 자유하지만 중생한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제자도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구원론에 속한다. 제자도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천국 가는 나그네이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의 씨'(요일 3:9)가 있다. 우리는 성도의 견인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생명의 부활로 주님을 만날 때까지 '하늘나라 소망을 명상하고' 전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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