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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칼빈의 종말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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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2일(목) 10:05
황정욱 / 한신대학교 교수

루터가 믿음과 칭의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면,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차적 관심을 두었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을 수 않았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넘치는 공적 및 연옥 불, 최후 심판에 관한 사변 등을 통해서 평신도들의 공포를 자아내고, 이를 통해 면죄부의 악습을 연장해 왔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6세기의 일부 광신적 열광주의자들이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개혁자가 그러하듯이 칼빈도 필요에 따라서, 그의 저작 속에서 종말론에 관하여 논하였으며, 특히 초기 작품인 '프시코파니키아'(Psychopannychia)는 종말론을 주제로 다룬 단일 저작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칼빈의 '프시코파니키아'에 나타난 종말론적 사고를 서술하고 나서, 기독교강요 중 '미래 삶에 대한 명상'(III, 8)과 '최후의 부활'(III, 25)에서 나타난 종말론적 입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칼빈은 '프시코파니키아'에서 영혼 불멸설을 그리스도교의 진리라고 확신하였고, 본문 전반부에서 영혼의 본질과 영혼 불멸을 성서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후 영혼의 운명에 관해서도 본질상 영혼은 늘 깨어 있다고 확신하는 반면, 영혼 불멸설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교설도 오류로 단정하였다.

칼빈은 '영혼의 안식'은 '영혼 수면'과 엄밀히 구별한다. 영혼의 안식은 이미 영혼의 깨어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 데서 칼빈이 영혼 수면설을 정적주의적 이해로 간주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영혼 수면설은 영혼이 믿음과 신의 말씀 안에서 나태하고 비활동적으로 안식할 수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준다.

신이 은혜의 의지에 근거해서 자기 인간들을 선택하고 구원으로 인도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칭의와 동시에 성화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칭의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육'과 '세상'을 '욕망' 내지 '정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영혼은 언제나 거듭하여 그의 육적 욕망을 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나태해서는 안되고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칼빈이 말하는 '영혼의 깨어 있음'은 무슨 의미인가? 중간 상태에서 연옥불에 의한 정화는 칼빈에게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중간 상태에서 영혼이 '육'과의 싸움을 이미 종결하고 안식한다는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혼의 안식에 관한 그의 변증법적 표현은, 종말론적 연속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지시한다. 죽은 자는 여전히 궁극적 구속을 기다린다(칼빈은 중간 상태를 시간적으로 최후 심판의 날까지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칼빈이 생각하기에는 선취된 종말이 중간 상태에서 영혼 수면을 통해서 종결된다면, 종말론적 연속선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영혼 수면설은 영혼 불멸을 부정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락 상태가 중단됨을 의미할 것이다.

칼빈이 중간 상태를 시간적으로, 인간 중심적으로 이해한다면, 칼빈의 종말론적 견해는 여전히 종교개혁 이전의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미 실현된 종말에 대한 발언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개혁적 칼빈을 발견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중간 상태에 있어 영혼 불멸론을 옹호하는 점에서는, 가톨릭교회 전통에 구속되어 있는 칼빈을 발견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중 '미래의 삶에 대한 명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곧 성화에 대한 진술 가운데 일부분으로서 앞의 여덟 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이 장에서 칼빈은 현재의 삶에 대한 경멸과 미래의 삶에 대한 동경을 진술한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허망함에 대해 진술한다.

우리가 현재 삶에서 당하는 갖가지 고통은 모두 신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허락한 수단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재 삶에 대한 경멸은 불교적 현실 탈피주의를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증오의 자세는 신에 대한 배은망덕을 뜻할 것이다. 삶은 신의 선함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며, 현실은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 단계, 혹은 훈련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현재 삶에서 신의 관대함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

'프시코파니키아'에서 본 대로, 칼빈은 두 단계의 인간 구원을 생각한다. 첫 번째 단계는 영혼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화를 통해서, 우선 영혼의 생명을 회복함으로써 아담의 타락에 좌절된 인간의 실현을 새로이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의 새 창조이며 신과 아담적 인간의 친교의 회복이었다. 최후의 날에 일어나게 될 두 번째 단계는 몸에 관한 것이다. 구원사는 인간의 완성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간다. 신의 아들은 이 인간론에서 완성의 도상에 있는 완전한 인간의 모형으로 간주된다.

그런 이상, 구원사의 목표로서 육신성을 지시하는 것은 중간 상태에서 영혼의 복락에 대한 관심과 긴장 관계에 있다. 이런 비일관성의 원인은 아마도 그의 영혼-몸의 이분법, 그리고 영혼의 존대에 있는 듯하다. 미래 완성을 지향하는 구속론이 '미래의 삶에 대한 명상'과 대립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칼빈이 플라톤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몸의 부활론을 영혼 전이론으로 대치했을 것이다. 다만 그의 구원사적 사고가 이것을 저지한 듯하다. 육신성이 신에서 창조되었고 인간이 그것의 구원으로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이므로, 칼빈은 구원사의 틀 안에서만 육신성을 말한다. 그러나 칼빈의 관심은 몸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영혼의 제고된 복락에 있다. 그에게는 몸의 부활은 일차적으로 구원자의 도래, 신과의 행복한 연합을 뜻한다. 인간의 구원에서도 영혼-몸의 본성적 이원론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된다.

칼빈은 '프시코파니키아'에서 연옥설 등에 대한 반대 입장을 암시하기만 했던 반면에 '기독교강요'에서 성서적 시각에서 볼 때 성립할 수 없는 모든 가톨릭교회의 교설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주로 죽음 이후 영혼의 복락에 관심을 갖는 종전의 종말론적 견해를 바꿔 놓지는 못했다.

또 한 가지 언급해야 한다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영혼과 육신의 존재론적 상이성을 전제하였을지라도, 중간상태에서 영혼의 복락론은 몸의 부활론에 비해 후퇴하였다. 몸의 부활은 이제 중요한 신앙 고백 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강요'의 불가결한 장을 이룬다. 따라서 영혼 불멸 및 중간 상태론과 같은 특별 주제는 다만 간단히 서술될 따름이다.

그러나 칼빈에게서 몸의 부활과 영혼 불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은 영혼 불멸을, 몸의 부활을 보증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칼빈의 견해에 따르자면 부활은 영속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이 최후의 날에 비로소 몸과 함께 새로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혼 불멸 뿐 아니라 몸의 부활도 확신했다. 그에게서 두 이론 가운데 양자 택일은 찾아 볼 수 없다. 결국 '프시코파니키아'에서 관찰한 견해들은 '기독교 강요'에서 대부분 수용되었다. 심지어 일부 성서 주석은 '프시코파니키아'에서의 해당 본문 주석을 재현한 것이다. 칼빈 신학이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프시코파니키아'에서 형성된 구원사적 방향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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