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감사 넘쳤던 그리운 땅,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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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호선교120주년기획 ] 원성희선교사의 '가르치고 섬기며 사랑받았던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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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05일(목) 10:02

 

   
▲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친 후 호주에서 살고있는 원성희선교사와 호주 멜본서부교회 담임으로 사역 중인 변창배목사(앞줄 왼쪽).
원성희권사 / 전 호주연합교회 선교사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선교동역자로 44년간 일한 것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사역에 따라서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962년 6월까지 2년간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어을 배운 뒤 부산에서 복음전도 사역에 종사했다. 필자가 파송을 받은 목적은 당시에 중요한 사역으로 간주하던 '학원선교'였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사역은 여러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지회를 돌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의 일환으로 KSCF의 여러 위원회 모임과 대회에도 참석했다. 필자는 KSCF의 이사로 섬기면서 부산지역의 협동총무를 겸하고 있었다. 동시에 서울에서 하던 영어성경공부반을 지도하고, 교회 찬양대에 출석하거나 피아노를 지도하는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계속해서 참여했다.

부산 시절에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사역은 북한에서 피난을 내려온 어떤 여신도가 세운 정신지체아동 수용시설을 포함한 자선학교들과 여러 고아원을 보살피는 것이었다. 정신지체아동 수용시설은 그 여신도의 아들도 재정적으로 뒷바라지를 했고 시당국도 약간의 보조를 했지만 재정적으로 곤란한 처지였기 때문에 우리 선교부의 지원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좌천동의 부산성경학교와 부산신학교에서 수년 동안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내게도 좋은 경험이었다.

6.25 전쟁 뒤 호주교회는 부산의 호주장로교선교부로 많은 구호물자를 보냈다. 옷, 세면도구, 학용품을 비롯한 갖가지 생활필수품을 담은 '선교상자'를 해마다 수 백 개씩 받았다. 이러한 구호물자는 위에 언급한 학교나 자선기관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도움이 되었고, 부산 근교 농촌의 조그만 교회에서 사역하던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필자는 1963년에 이 구호물자를 분배하는 일을 맡아서 이분들의 목회사역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1967년에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께서  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지 물어오셨다. 교수로서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었지만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호주장로교선교부의 부산 현지 위원회와 호주 본국의 선교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선교위원회와 협의했다. 몇 분에게는 개인적인 조언도 구했다. 최종적으로는 사역을 변경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그것은 내게 중대한 변화였다. 1968년에 기독교교육과에서 가르치면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1년간 여자기숙사의 사감을 겸했다.

첫 해가 다 지나기도 전에 필자가 대학교에서 교수하기에는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음악 분야에는 준학사(디플로마)외에 다른 학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협의 끝에 멜본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학점을 이화여자대학교로부터 인정을 받은 뒤에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9년 3월부터 이화여대 성악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신학교의 교수와 교회 사역, KSCF를 비롯한 다른 기관의 사역을 계속하면서, 내게는 외국어인 한국어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1971년에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 김옥길총장께서 석사학위를 공부하고 이화여대의 교회음악과 교수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교회음악을 가르치는 수준 높은 대학원을 찾았다. 뉴저지 프린스톤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음악대학에 지원해서, 1974년 8월까지 공부하고 드디어 1975년에 졸업을 했다. 그런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좋은 학문을 배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감사한 일이었다.

그 뒤 24년 동안 이화여대에서 전임강사로 시작해서 정교수로 은퇴하기까지 교회음악과 성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과목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수많은 합창단을 지휘했고, 성악가나 교수, 지휘자가 된 탁월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한국말로 네 권의 책을 출판하고, 각종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기고하는 한편, 2번의 듀엣 음악회와 12번의 독창회를 가졌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다수의 찬양대를 지휘하면서 여러 곳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1998년 2월에 명예교수가 되면서 이화여대에서 은퇴했다. 

이러한 필자의 순례는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기념 한국교회음악교육원을 세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교회의 교회음악지도자 양성을 통해 한국 교회음악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김동익목사님과 당회의 요청으로 세워진 기관이다. 필자는 1998년에 설립할 때부터 2003년에 사임할 때까지 음악교육원의 원장으로 섬겼다. 그 사이에 수 백 명의 찬양대원, 솔리스트, 오르간 연주자, 피아니스트, 지휘자들이 여러 교파로부터 찾아왔다.

음악교육원은 기간에 따라서 단기와 장기로 구분된 과정을 여럿 두어서 수강생들이 수준에 맞게 이수하게 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이 한참 젊은이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과정을 마치고 나갈 때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음악교육원이 계속 번창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필자는 1977년에 호레이스 G. 언더우드 박사와 결혼하면서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찬양대원으로 출발해서 솔리스트, 찬양대 지휘자, 권사, 성경 교사, 여전도회연합회 특강 강사, 여러 위원회의 위원으로 봉사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필자를 한 사람의 친구로, 신앙의 동지로, 그리고 같은 길을 가는 믿음의 순례자로 받아 준 성도들을 만난 것이다. 필자가 서울시 명예시민이 되었을 때 가장 기뻐해 준 것도 새문안교회의 교우들이었다. 지금은 호주의 멜버른에 살지만 그 분들이 참으로 그립고, 보고 싶다. 필자가 한국에 주고 온 것보다 감사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고백한다. 한국에서 살던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번역:변창배목사 ㆍ멜ㆍ멜본신학대학교 박사과정 재학/본서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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