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 수 있다"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34)칼빈의 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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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5일(목) 11:22

정 홍 열 /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독교강요 I.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안에서 인간론을 독립적인 부분으로 다루지는 않으나 그의 신론(기독교강요 I권)과 기독론(기독교강요 II권)의 중요한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강요 전체가 사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는 언제나 인간의 창조와 타락, 구원의 과정이 하나님의 주도적 사역 안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인간을 이처럼 인식하는 점에서 기독교 인간이해는 세속적 인간이해와 구분된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칼빈은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해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고 이해한다. 먼저 인간은 율법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원래의 의에서 떠나 더 이상 스스로 의를 실천할 수 없는 절망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타락한 영적인 상태를 인식하게 된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이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기독교강요 II.7.3)

그러나 인간은 율법만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복음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장차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될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이런 새로운 자기 인식은 인간을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감사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인식은 역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식으로 이어진다.(기독교강요 II.7.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칼빈의 인간론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설명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한 점이 있다. 여기서는 일단 그 주요사상들을 소개하면서 논점이 되고 있는 내용들을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해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잘못된 견해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먼저 스콜라주의자들(당시의 가톨릭 신학)이 범하는 오류로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면서 타락에 의해 형상은 남아있으나 모양은 상실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칼빈은 모양이란 형상에 대한 추가적 설명으로 동일한 용어의 반복을 피하고자 적용된 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형상과 모양은 같은 뜻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주장한다(기독교강요 I.15.3).

이어서 칼빈은 오시안더의 주장을 반박한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모두 관련된다고 주장했으나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선 영혼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의 육체를 분별없이 숭상하려는 시도를 경계하면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구분을 주장했다(기독교강요 I.15.3). 칼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에 새겨놓았다고 가르침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는 인간의 통로가 됨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놓으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생각하고, 알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접촉점이 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주장했던 마니교적 영혼이해를 반박했다. 세르베투스는 영혼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생명의 호흡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 혹은 본질이 인간 안으로 주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이 약하고 가변적이고 죄악되고 무지한 셈이 된다고 반박한다. 영혼은 주입이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도 본질의 유입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기독교강요 I.15.5)

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 시에 인간이 지녔던 완전함을 뜻한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부패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것도 스스로 이룰 수 없다. 하나님 형상의 파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와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해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향하고 의존해야 한다. 성자의 인격 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의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이로써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와 화해하고 본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단, 타락 이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을 뿐이다. 타락한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했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인간이 잘못 사용함으로 타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기독교강요 II.2.8)

칼빈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타락의 책임소재를 밝힌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문제였고 여기에는 창조의 질서에서 최고의 왕관으로 인간의 위치가 선포되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는 타락의 원인을 인간자신에게 둠으로 심판의 소재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신학적 이유도 된다.

로마 가톨릭은 타락 이후에도 잔존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으나 종교개혁자들(칼빈)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인간의 구원이나 선행의 가능성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자유의지의 상실을 통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는 이면엔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이 역설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이었다.

 구원받아야 할 인간
인간이 자신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경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시켜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요 구원의 창시자로 알게 된다.(기독교강요 I.2.1)

칼빈은 경건생활의 첫 걸음으로 믿음에 관해 설명하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과 우리를 지켜주시며 주관하시고 양육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으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하나님을 알더라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자만이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기독교강요 II.6.4)

루터가 신학을 죄인인 인간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설명이라고 정의했듯이 칼빈의 신학이해에 해당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자기지식이라는 말에도 역시 죄인인 인간과 그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했다.

칼빈이 그토록 인간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의 인간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스스로 설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살리라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이 칼빈 탄생 5백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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