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오직 '은혜'로 작용ㆍ완성되는 '언약의 법'

율법, 오직 '은혜'로 작용ㆍ완성되는 '언약의 법'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29) 칼빈의 법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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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26일(수) 15:57

칼빈의 율법관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핵심사상으로서 전개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함 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순종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로써 율법이 제시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써 본질상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계시되어 있다.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율법은 그것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영원성, 능력, 지혜, 선, 진리, 의, 자비'를 계시한다.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는 언약 백성의 소명을 확인하게 되고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어떠하심을 깨달아 알게 된다.
 
칼빈은 율법을 광의적으로 이해하여 십계명과 함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가르쳐주신 '종교의 양식'을 포괄하는 것으로 여긴다.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계시한다.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했으므로 율법 앞에서 즉시 자신의 비참함을 통감하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율법은 이러한 저주의 기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는 스스로 되지 아니하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다 전가해 주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율법이 신학적 작용을 하는 것은 오직 '은혜 언약'에 정초해서만이다. 율법이 '언약의 법'이라고 불림이 마땅한 소이이다.
 
칼빈은 율법의 규범적 본질을 추구한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길로써 기능한다. 그러나 그 본질적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인류의 죄행을 드러내는 정죄적 사역을 '예외적으로' 감당하게 된다. 즉 율법은 교훈하고 정죄하는 이중적 사역을 수행한다.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작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마침'은 '완성'을 내포한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은(마 5:17-18) 자신의 영을 부음 받은 백성이 자신의 중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를 전가 받아서 자신 속에 계시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자리에 세우심에 있다. 즉 언약의 은혜로 '옷 입혀진' 율법을 성도들이 즐겨 지키는 자리에 세우심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이는 율법은 어떤 신학적 기능도 감당할 수 없다. 율법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헛되다. 율법이 죄를 깨달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기능을 하게 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율법의 규범대로 행하여 상급을 받게 됨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받으시기 때문이다.
 
칼빈의 이러한 율법 이해는 율법의 본질을 정죄적 규범으로 파악하여 율법과 복음을 엄격히 단절하고 "율법은 항상 정죄한다"는 모토를 견지했던 루터란의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
 
율법의 본질을 규범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칼빈은 율법의 삼중적 용법을 전개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세심히 살펴보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해서 절망에 이르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게 하는데 이를 제1 용법이라고 부른다. 이를 신학적 용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계시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드러내고, 정죄하며, 마침내는 저주하는 가능을 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정당하고' '선한' 것으로써, 일단 그 명령으로 사람들을 좌절케 하지만 동시에 그 약속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게 한다. 이러한 용법은 특히 칭의 과정에서 역사하는 구원의 회개와 관계된다.
 
율법의 제2 용법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를 억제케 하는 기능이다. 이 용법은 제1 용법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는 영혼의 상태에 기인하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오직 '외부적인 행위'에 관련된다. 제2 용법도 '교사'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가르치는 율법의 규범적 사역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법의 용법과 동일시하는 우(愚)는 피해야 한다. 칼빈은 율법과 자연법이 그 원리에 있어 '공평'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누차 강조하였는데 이는 특히 제2 용법을 염두에 둔 논의이다.
 
율법의 제3 용법은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작용하는 용법"을 지칭한다. 루터는 이 용법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멜랑흐톤은 율법이 성도들에게도 역사하지만 여전히 정죄의 작용만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이 용법과 관련하여 교훈과 권고의 기능에 주목한다.
 
가르치는 사역으로써 율법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순수하게 알아가는 진보가 있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뜻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권고하는 사역은 성도들을 경성시켜서 말씀 가운데 굳게 서게 함으로써 순종의 결단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작용을 의미한다. 권고의 사역은 지식적 교훈의 수준을 넘어서 의지적이다.
 
칼빈은 이러한 율법의 용법이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도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선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없다면 율법에는 어떤 '즐거움'도 어떤 '달콤함'도 없다.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은 본연의 규범적 사역을 감당하게 되니, 율법의 제3 용법이 그것의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목적에 가깝다.
 
율법의 용법이 이러하므로 율법의 해석은 율법의 '입법자'시며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부합해야 한다. 율법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써 신령한 것이니 신령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 해석에 있어서 언어의 문자적 의미에 갇혀서는 안 된다. 금지하는 규율일지라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은 힘자라는데 까지 이웃을 먹이고 살리라는 규범으로 받아야 한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의무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함께 아우르는 폭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칼빈은 율법의 본질을 규범으로 이해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분의 뜻을 동시에 계시함으로 성도의 구원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작용함을 강조함으로써 이후 언약신학의 핵심 교리의 단초를 제시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율법의 작용 전체를 중보하심으로써만 율법이 신학적 기능을 본질적으로 수행함을 타당하게 적시하여 복음과 율법, 신약과 구약이 경륜에 있어서는 다양하나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하였다. 이로써 초대 교회 이후의 신학의 대주제인 로고스와 노모스의 관계를 올바로 수립하였다.

문 병 호
▲ 現 총신대 교수(조직신학)
▲ 총신대 신대원(M. Div.)
▲ 美 웨스턴신학교(Th.M.)
▲ 英 에딘버러대(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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