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넌 사랑, 세대를 이어 큰 나무로

바다 건넌 사랑, 세대를 이어 큰 나무로

[ 아름다운세상 ] 조유택목사와 플로렌스 여사의 핏줄보다 진한 사랑이야기

김보현 기자 bhkim@kidokongbo.com
2006년 04월 30일(일) 00:00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되고, 또 사랑은 얼마나 오랫 동안 기억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장을 잃고 피난 길에 올라 힘겨운 생활을 견뎌야만 했던 한 가정의 막내였던 한 소년. 그에게 바다 건너 사랑의 손길을 펼쳐졌고 매달 부쳐오는 후원금을 받으며 또 다른 어머니와의 만남은 시작됐다.

동족 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은 파괴와 죽임과 헤어짐 등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남겼는데 그 아픔의 첫 자리에는 기독교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당이 파괴되고,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를 포함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납치되거나 순교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남겨진 가족들 역시 고향을 등지고 힘겨운 낯선 삶의 현장으로 내몰려야 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교회인 남대문교회를 시무 중인 조유택목사에게 새 봄의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찾아 온 이른 봄날, 난생 처음 만나는 이였지만 가족보다 더 반가운 손님들이 먼 바닷길을 돌아와 반가운 해우가 이뤄졌다.

조 목사의 선친인 고 조석훈목사는 1905년 9월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뒤 은율군 누리교회에 시무하던 중 한국 전쟁을 맞게 됐다. 19050년 10월 15일 공산 치하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던 조 목사가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 뒤 어린 7남매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제도와 부산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게 됐고, 조 목사는 어린 형제들과 함께 서울시 중구 묵정동에 소재했던 모자원 시설인 순애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때 한국 전쟁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전 세계에 어려움에 처한 아동들을 돕고 있는 기독교아동복리회(CCF)가 국내의 순교자 유자녀를 비롯해 부모를 잃고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을 위한 후원자를 모집하게 된다. 이때 위스콘신 주의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플로렌스 래드롭 여사가 바다 건너 날아온 안타까운 소식에 기쁘게 응답함으로 첫 만남이 이뤄지게 됐다. 당시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조 목사는 후원금과 함께 소식이 전해 올 적이면 어김없이 답장을 보내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렇게 쓰여진 편지는 돕는 이들의 손길을 통해 영문으로 번역돼 래드롭 여사에게 전달됐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손길은 조 목사가 중고등학교 들어가게 되면서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스스로 써보내는 편지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진다는 점뿐이었다. 조 목사가 비슷한 형편에서 후원을 받게 됐던 이들이 대략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내면서 후원이 중단되거나 후원자와의 연락이 두절되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과정에 진학할 때마다 변함없이 감사의 마음과 소식을 전하는 조 목사와 플로렌스 할머니와의 사랑의 편지와 흑백 사진을 매개로 꾸준히 이어져 갔다.

사진들 가운데에는 새로 구입한 가방을 들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게 됐다는 소식도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플로렌스 할머니의 남다른 건강으로 인해 조 목사가 대학과 장신대 신대원을 마친 뒤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이제 후원은 중단됐어도 사랑의 소식만큼은 계속될 수 있었다.

1984년, 어린 순교자의 자녀는 자라 40대의 어엿한 목회자가 되었고, 한국 땅의 아들을 후원해 온 '어머니'는 90이 넘은 노파가 되어 평생을 살았던 위스콘신 주 보스코벨의 한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 30년 간을 오가던 고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 간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현지 한인 신문과 지역 신문은 아름다운 만남을 장문의 기사와 함께 보도했고, 이제는 중년의 목회자가 된 아들의 손을 맞잡은 플로렌스 할머니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보다 비로소 한 가족으로 이뤄진 만남에 표현 못할 감동과 기쁨을 만남 이후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 편지글에 실어 보냈다.

1994년 1백2세를 일기로 플로렌스 할머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비록 1백 회 생신 때 다시 찾겠노라는 약속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바다 건너 이어진 고귀한 사랑은 주고 받은 편지와 낡은 앨범을 장식한 신문 지면과 몇 장의 빛바랜 사진만으로 끝날 수 없었던가 보다. 그로부터 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바다 건너 이어진 사랑이 세대를 건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만남이 준비되고 있었다.

플로렌스 할머니의 손녀로 그 어떤 자녀보다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며 성장한 파멜라씨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할머니가 '내 아들'이라 부르며 그리워 하던 조 목사를 떠올리게 됐고 부부가 함께 여행을 준비하며 또 다른 가족이 살고 있는 한국 방문 계획도 함께 세웠다. 그러나 당시에 스칼라씨 부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오직 한국에서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평생 할머니로부터 들으면 자란 이름 석 자뿐이었다.

반 년의 수소문으로도 찾을 길이 막연했던 이들 부부는 무작정 인근의 한인교회를 찾았다. 이름과 함께 한국에서 목회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어떠한 단서라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인터넷을 통해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연락은 쉽지 않았다. 여행길에 오르기 전날까지 회신이 없던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행길에 올라 여러 나라를 거치는 동안 이번에는 친구들이 메신저가 되어 재회를 위한 연락에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플로렌스 할머니를 사랑하는 한국의 아들과 미국의 손녀는 첫 만남에서부터 반갑게 얼싸안으며 하늘에 계신 할머니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이 두 가족의 하나된 만남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감동 속에 진행됐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를 '손녀'는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영어 소통에는 문제가 없으면서도 혹시라도 간절한 심정이 전해지지 못할까, 세세한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때 교회 내 중직자들이 앞다투어 통역과 안내를 자청해 동행하며 이들의 만남을 축하해 주었다.

이제는 손자녀를 둔 조 목사와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상징으로 20년 전 신문 기사를 복사해 온 스칼라씨 부부의 세대를 넘어선 가족 사랑은 백 마디 인사와 정성스런 선물보다 따뜻한 포옹과 눈가에 맺혀 흘러 넘친 한 줄기 눈물로 비로소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순교자 조석훈 목사의 가계(家系)
조유택목사는 순교자의 가족이자 보기드문 목회자 가족이다. 부친 고 조석훈목사가 순교한 지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일곱 자녀 가운데 네 아들인 의택 인택 영택 유택 네 아들은 모두 목회자가 되었는데 위로 두 형제는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였고, 순교자 유족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영택목사는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갈릴리선교회를 이끌고 있으며, 3녀 가운데 선희 선옥 두 자녀는 목회자의 부인으로 교회를 섬겨 왔고, 3년 송산도 현재 전도사로 대덕교회에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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