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의 자리에서 힘을 다하여

나의 삶의 자리에서 힘을 다하여

[ 목양칼럼 ]

신민섭 목사
2024년 09월 11일(수) 09:45
3월 말이나 4월 초순이 되면 모내기 준비를 한다. 여러 기계를 연결하여 모판을 얹어주면 모판은 자동으로 이동한다. 그 이동하는 모판에 흙을 깔아주고, 볍씨를 뿌려주고, 볍씨에 필요한 비료와 흙으로 다시 덮어주고 물을 뿌려주면서 마지막 도달하면 모판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리고 약 40여 일이 지나면 모는 자라나서 논으로 이사할 준비, 곧 모내기를 하기 위해 트럭에 모판을 싣고 논으로 이동한다. 이미 갈아 놓고 비료도 뿌려지고, 무엇보다 평평하게 준비가 된 논에 이양기는 모판을 싣고 논을 누비며 모를 쑥쑥 심어댄다.

이렇게 심어진 모들이 이젠 벼라고 이름 불려지고, 제법 이삭들이 알알이 맺혀 고개도 숙여간다. 일찍 심은 벼(조생종)는 벌써 벼 베기를 마친 논도 있다. 작은 알맹이가 자라나고 수많은 열매를 맺는 벼와 같은 모습은 농촌에서 늘 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풀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흙 위로 덮은 검은 비닐에 간격이 일정하게 뚫린 구멍에 작은 고추모를 심고 그 고추모가 자라나면서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곧게 자라나도록 지주대를 세우고 묶어 주는 수고를 하고 나면, 작은 하얀 고추꽃이 피고 푸르디 푸른 고추들이 맺힌다. 그리고 햇볕과 수분을 잘 받고 자라나면서 예쁜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맺힌다.

이때부터 농부의 손길은 더욱 바빠진다. 빨간 고추를 그대로 두면 말라죽거나 문드러지면 버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추나무에 열매가 맺었다고 끝이 아니다. 그것을 잘 따서 잘 말려서 팔거나, 고춧가루로 빻아서 판매하여 돈이 될 때 드디어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농촌의 일상은 해가 뜨면 들에 나가서 고추를 따기 시작하고, 논두렁과 밭두렁에 제초 작업을 하며 그때그때 심어놓은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쉼 없는 보살핌과 적절할 때 잘 수확하는 수고가 쉼 없다.

이러한 농사와 농작물의 자라남을 보면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아무리 좋은 품종을 심고,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잘 심고, 물을 주고, 약을 해도, 농부의 범위를 벗어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고추농사가 그랬다. 마을 분들과 성도님들은 수고하며 부족한 인부를 사서 잘 심었다. 예쁜 고추꽃도 피고, 지주대를 세우고, 줄로도 잘 묶어 주었다. 태풍의 피해도 없었다. 좋은 수확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런데 고추 농사에 가장 좋지 않은 탄저병이 돌았다. 고추를 따기도 전에 하나하나 고추들이 메말라 갔다. 하얗게 말라 죽어 버렸다. 그 넓은 밭의 고추들이 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본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구에게 하소연도, 누구에게 잘잘못을 전가 할 것도 없다. 보이지 않는 탄저균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탄저병이 와서 고추농사가 안됐다. 이에 소비자들은 고추를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농사의 현장에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본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그렇다. 심고, 물 주는 사역자들의 수고가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농사의 현장만이겠는가? 교회의 사역 현장도 마찬가지요, 가정의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니 나는 게을러도 좋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심는 자, 물 주는 자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도노트 표지에 이렇게 기록해 놓는다. "녹이 스는 삶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삶이 되자."



신민섭 목사 / 군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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