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진실 사이에

거짓과 진실 사이에

[ 논설위원칼럼 ]

김영권 총장
2023년 11월 06일(월) 09:59
'가짜뉴스'는 최근 우리 사회 매우 주목받고 있는 키워드이다. '가짜뉴스'란 거짓으로 꾸민 거짓말, 사실과 달리 조작된 기사 및 보도 등을 지칭한다. 이러한 '가짜뉴스'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다. 언제고 존재해 왔고,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가짜뉴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두 가지 관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가짜뉴스'가 야기하는 사회 부정적 결과이며, 다른 하나는 '가짜뉴스'가 제기하는 사회 내적 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반면에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참이다"라며 참과 거짓을 개념화했다. 주관적인 판단보다 객관적 사실에 우위를 주장한 셈이다. 실로 사실에 대한 왜곡은 많은 부정적 폐해를 낳는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팩트체크는 매우 중요하며,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법은 현시대에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201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를 그해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여기에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정과 개인적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시대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가짜뉴스'는 단순히 거짓말이 아니며, '가짜뉴스'에의 호응 또한 인지능력 저하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이나 착각으로 볼 수 없다는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즉, '포스트 트루스' 현상 자체가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라기보다 위기의 실체적 징후로 봄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라는 표현은 사실의 왜곡을 규탄하며 사실의 내용을 밝혀드러내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한편 '가짜뉴스'가 가공되는 실체적 징후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 또한 또 하나의 목적임이 틀림없다. '가짜뉴스'의 속성상 진실에 대한 정교한 은폐와 왜곡은 진실에 대한 무지가 아닌 진실에의 저항이며, 사실에 대한 무관심이자 수용거부를 뜻하는 의사소통적 일탈이다. 그 점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대응은 의사소통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진실은 거짓이 아님을 뜻하는 것으로서 충분치 않다. 진실은 그 자체로서의 의사소통적 효용성을 수행한다. 진실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네러티브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 진실의 이야기에 참여시키는 방식에 있어서 타인이 처한 진실의 자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진실이 마주하며 대화와 소통의 우정의 장을 통해 상호 연대가 가능한 공동체적 사회를 지향하는 더 큰 담론을 여는 공론의 새 장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는 '가짜뉴스'로 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다. 그것은 한편 '가짜뉴스' 때문에 겪는 갈등일 수도, 갈등 상황에 의해 출현한 '가짜뉴스'일 수도 있다. '가짜뉴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이면의 자리에 도사리는 갈등이다. 이 갈등은 사회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상황에 처한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 역시 '가짜뉴스'에 편 가르기 문화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교회의 이러한 현상은 교회 본질에 반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안은 무엇인가? 포스트 트루스적 사회현상이 던져주는 의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여 그것에 대한 진중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위기의 본질은 인식의 부재라기보다 연대적 관계 훼손에 가깝다. 따라서 문제해결을 위해 사실에 주목하기보다 태도에 주목하고 인식이 아니라 관계에 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폄훼하지 않고, 공감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읽으며, 은폐된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공감적 대화를 실천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김영권 총장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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