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들을

[ 논설위원칼럼 ]

최승기 교수
2023년 10월 09일(월) 10:11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하면서 오랫동안 잔상이 마음에 남아 있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는 야드바셈 기념관이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기념하는 곳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들려오는 이름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살아남은 자들과 후세대들의 다짐의 결기가 불리는 이름에 실려 밀려오는 곳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해 야기된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PHEIC) 선포를 약 3년 4개월 만인 올해 5월 5일에 해제하였다. 이 해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주기적으로 발흥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엔데믹(endemic, 감염병 주기적 유행) 시대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인류가 탐욕에 기초한 과도한 풍요 추구의 삶의 방식을 전환하지 않는 한, 야생 동물의 경계선을 넘어 인간에게로 침투하는 바이러스들에 의한 팬데믹은 계속 발생할 것이라 전망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인류가 더불어 살아갈 지속 가능한 인류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의해 희생된 약 690만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토대 위에서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이들은 그냥 숫자로 뭉뚱그려 언급되었다가 쉽게 망각되어질 무리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이웃, 우리의 일부이다. 토마스 머튼은 수백만 명이 함께 경험하는 사건은 시대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약 69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전 인류가 두려움을 느끼며 경험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분별이 요구되는 시대의 표적임이 틀림없다.

오늘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도 빨리 망각하고 있는가? 공중보건위기상황의 해제 이후 불과 5개월 만에 시대의 표적으로서 코로나19 팬데믹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공동의 작업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교회의 목소리는 주로 팬데믹 기간 동안 줄어든 교인의 수와 비대면 예배의 문제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교인의 수가 팬데믹 이전으로 회복되고 대면 예배가 강화된다고 하여도 팬데믹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내외적 모습과 내용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공동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뉴-노멀의 생활 방식과 신앙생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팬데믹이란 거울이 보여준 우리의 민낯은 적지 않은 성도들이 구도자적 자세로 홀로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제공하는 집단적인 영적 훈련의 우산 아래 있던 성도들이 펜데믹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우산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신앙의 약화와 혼란을 경험하였다.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책임성을 지니고 홀로 하나님께로 향한 고유한 영적 여정을 구도자적 자세로 걸어가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홀로 걸어간다는 것은 함께 걸어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구도자적 자세로 자신의 고유한 영적 여정을 걸어갈 때 타인의 고유한 영적 여정도 존중하며 서로를 하나님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영적 동반자들로 여길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팬데믹의 상황도 성도들의 신앙을 약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성도들이 구도자적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영적 여정을 걸어가도록 돕기 위해서는 그동안 영향을 받아왔던 교회의 양적 성장 우선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양적 성장 우선주의는 복음화가 교회 성도 수의 증가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의 전 영역이 온전히 복음에 의해 통치되는 차원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복음 전도와 완전(영적 성숙)의 추구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역동적인 중용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들을. 시대의 표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공동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분별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신앙생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최승기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영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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