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닌 설교

설교 아닌 설교

[ 논설위원칼럼 ]

김승호 교수
2023년 09월 11일(월) 13:32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통하여 설교를 준비한다. 그런데 오늘날 회중은 이상하게도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를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성경 본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선은 자연스레 설교자와 회중에게로 간다.

회중이 문제인가? 그럴 수 있다. 노년 세대에게 설교는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X세대와 MZ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에게 설교는 그 정도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같은 본문의 다른 설교를 다양하게 접한다. 그러면서 각 설교에 대한 평가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선포라는 사실을 강조해도,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평가라는 도마 위에 특정 설교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재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물론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들의 설교 평가 항목은 설교자에 대한 신뢰도, 본문 주석과 해석의 적절성, 설교 주제에 관한 관심도와 같은 것일 수 있다.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설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 사역 약화의 일차적 원인은 설교자에게 있다. 자신의 설교가 회중의 영혼에 꽂히지 않고 단지 허공을 맴돈다고 느낄 때, 설교자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회중에게 전달하는 행위라면, 과연 나는 어떤 과정을 통해 방대한 성경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는가?" "준비한 설교가 '진정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지' 나는 어떻게 확인하고 있는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은 하나의 레토릭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설교가 인간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설교 전달 시간이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면, 말씀이 전해지는 현장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어야 한다. 그것이 회중의 눈물의 회개나 설교자를 향한 분노 같은 가시적인 사건이든지, 회중의 내적 감동이나 영혼의 변화 같은 비가시적 사건이든지 간에. 그러나 오늘날 설교가 전달되는 예배 현장에서 회중은 너무나도 조용해 보인다. 설교가 전달되는 도중이나 이후에,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듯, 회중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설교자의 잘못된 시각이 원인일 수 있다. 설교자에게 다가오는 중요한 유혹은, 성경 본문을 자신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 강화 수단으로, 혹은 자신이 반대하는 이데올로기 비판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이다. 설교자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특정 사상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런 설교자의 영향 아래 있는 성도들은 점점 더 그 설교자가 선호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로 훈련되어 간다.

지금 우리는 사적 정치적 이권을 위해 설교라는 이름으로 특정 이데올로기를 변호하거나 배척함으로, 성경을 성경 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설교 아닌 설교'로 인해, 한국교회 전체는 비이성적, 비상식적, 비인간적 종교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그로 인해, 침묵하는 다수는 소리 없는 썰물처럼 지금도 조용히 교회 울타리를 벗어날까 고민 중이다. 성경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시 나는 설교라는 이름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의 설교자가 자문해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김승호 교수 / 영남신대·목회윤리연구소 소장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