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막혀있는 남북교류, 그래도 평화 위해 나아가야

지금은 막혀있는 남북교류, 그래도 평화 위해 나아가야

[ 연중기획 ] '그래도 가야할 길, 평화' 6. 한국교회 통일 운동 역사

손승호 박사
2023년 07월 12일(수) 07:28
1988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계기독교한반도평화협의회 모습.
도잔소25주년 기념예배 모습.
첫 문장부터 세게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자발적으로 통일운동에 나선 것이 아니다. 물론 역사의 현장에 있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 나름의 판단과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세대를 훌쩍 지난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의 길로 등 떠밀려 간 측면이 강하다. 197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경직된 친미성향과 반공주의로 인해 평화나 통일을 말할 수 있을 만한 상황에 이르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한국교회를 평화와 통일의 길로 초대한 것은 박정희 정부였다.

1971년 4월 주한미군 7사단 2만 명이 미국으로 철수했다. 1969년 7월 미국 행정부가 발표한 닉슨독트린에 따른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충격을 받았다. 미군의 축소로 남북화해정책이 필요해졌다. 1971년 8월 남북 이산가족 찾기 회담이 제의됐고 1972년 7월 4일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폭탄이 떨어졌다. 공동성명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개념을 송두리째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북한에 기독교 복음이 퍼지면 내부에서 반공운동이 일어나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남한으로 흡수통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논리에 기대어 온 북한선교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교회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로 요약되는 공동성명의 통일원칙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특히 '외세를 배격하고 사상을 초월한' 민족대단결을 수용하지 못했다. 가장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여겨진 한국기독교장로회도 공동성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의 긍정을 보류"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공동성명의 정신은 지지하지만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염려했다. 이런 반공적인 기조는 1970년대 내내 유지됐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초부터 해외의 기독교인들이 북한과의 대화모임을 갖자 NCCK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스트리아 빈과 헬싱키에서 모인 이 모임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하고, 북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화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움직임에 경악한 NCCK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북한대표단의 방문을 불허할 것을 요청하고 스위스개신교연합회에 '적색분자' 기독교인들의 회의에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렇다고 마냥 훼방만 놓은 것은 아니었다. 급진적인 해외의 움직임과는 다른 한국의 통일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1981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였다. 분단된 양국(남한과 서독)의 교회들은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을 주제로 협의회를 개최하고 '자유와 정의가 보장된 평화스런 통일'에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한국교회가 통일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NCCK는 한독협의회의 결과에 따라 1982년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런데 NCCK의 1983년 통일문제협의회(3월)와 연구협의회(5월)가 정부의 방해로 개최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통일운동의 정당성이 강화됐다. NCCK는 교회의 통일논의는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WCC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당시 WCC 국제문제위원회의 나이난 코시(Ninan Koshy)는 NCCK의 도움 요청을 받고 "정말이냐?(Really?)"고 되물었다. 한국교회의 변화는 그만큼 급격한 것이었다.

WCC는 동북아시아 평화라는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기로 하고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3일까지 일본의 도잔소에서 '동북아 평화와 정의를 위한 협의회'를 개최했다. 남한 측 참자가들이 중앙정보부의 협조를 받아 북측 인사와의 접촉 가능성이 있는 도잔소 회의 참가 허락을 받았지만 북측의 조선기독교도련맹(이하 조그련)은 불참했다. 하지만 조그련은 이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도잔소 회의의 결과를 지지하였다. 이 회의에서 앞으로 교회가 취급할 과제들로 지적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① 이산가족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 ② 통일논의에 대한 대중적 참여 ③ 사회주의 국가 내 교회들과의 지속적인 대화 ④ 적대 의식의 극복 ⑤ 여성과 청년의 참여 증대 ⑥ 군비경쟁의 저지 등.

이런 결정들은 이후 '도잔소 프로세스(Tozanso Process)'라 불리며 지속됐다. 기독교 통일운동의 대체적인 틀은 이때 이미 잡힌 셈이다.

도잔소 프로세스의 일부로 서구와 일본 교회가 북한을 방문했다. 물론 한국의 NCCK는 북한을 방문할 수 없었다. 하지만 NCCK는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1985년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이 한국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자 선교적 사명임을 재확인"했다. 이어 1986년 채택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앙고백서'도 평화적 통일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언급하면서 NCCK 회원교단을 중심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남북의 기독교인이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1986년 9월 WCC 국제문제위원회의 주최로 제1차 글리온 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비록 긴장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는 말들이 오가기도 했지만 이 회의는 남북한의 교회가 대표성을 갖고 만난 첫 모임으로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글리온 회의는 이후 1988년 2차 회의, 1990년 3차 회의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내 상황이 급변했다. 민주화는 이제 민간의 통일논의가 비교적 안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은 상징적인 계기였다. NCCK는 1988년 2월 제37차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 이른바 '88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이제는 전통적인 원칙이 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수용하고 인도주의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더했다. 그러나 통일방안을 비롯한 통일국가 수립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종교적인 색채를 부각해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고백과 1995년 평화통일 희년선언을 포함했다. 한편 정부와 집권여당은 총선 패배 등의 악재 때문에 88선언을 발표한 NCCK를 제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정부가 민간의 통일담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1995년의 희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NCCK는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992년 NCCK 총무인 권호경이 북한을 방문하였고, 조그련의 인사들의 남한 방문이 성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993년에 있었던 '인간띠 잇기대회'는 22개 교단, 890교회, 55개 사회단체, 6만 448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이자 정부가 지원하는 첫 민간의 통일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93년 발생한 제1차 북한 핵 위기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더니 1994년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발생한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관계는 순식간에 경색됐다. 결국 1995년 희년사업은 대폭 축소되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통일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적인 교계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사업이 시작됐다. 1990년 한국기독교총연합이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에 동참했고, 1992년에는 교계의 보혁을 아우르는 '남북나눔운동'이 출범했다. 1995년 북한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돕기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물량지원에 유리한 상황에 있던 보수적인 교계의 활동폭이 점점 넓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또 다시 전체적인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2000년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교류와 통일담론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갔다. 정부의 전면 등장으로 그동안 남북교류의 물꼬를 터온 교회의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다양한 분야의 민간 교류가 활성화됐다. 새로운 상황을 맞아 한기총 계열은 북한교회 재건, 북한 인권문제 개선을 주요한 아젠더로 내세운 북한선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 갔고, NCCK계열은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기독교 통일운동의 기조를 유지해갔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사건이 발발하자 이명박 정부는 대북교류를 금지하는 5.24조치를 내렸다. 그 여파로 민간 차원의 대북교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거기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남북교류를 흥건히 적시고 있는 찬물을 꽁꽁 얼려버렸다.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 선교, 기독교 통일운동도 모두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오고 있다.

북한과의 교류가 어려워지자 북한 측의 상대가 필요없는 통일기도모임들이 더욱 활성화됐다. 대표적으로 2004년 시작된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는 2015년 기준 국내 12개, 해외 12개 도시에서 매달 기도회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이런 기도모임은 대체적으로 정치적 성격이 보수적이거나 북한을 둘러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황 분석이 부족하여 피상적인 내용 이상의 기도모임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반평화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이런 기도회의 상당수는 코로나 시국을 맞아 장기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기독교 통일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남북교류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다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문재인 정부의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이 부침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올해 정부는 이례적으로 NCCK가 30년 동안 유지해온 부활절 남북공동기도문 작성을 북한 주민 접촉에 해당한다며 경고조치했다. 우리 정부의 경직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정부도 그렇지만 북한 정권도 일체의 교류를 금지하고 있다. 일례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사업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UN의 대북제재까지 풀어놓았지만 북한에서 사업 재개의 연락이 없어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통일운동이 되었든, 북한 선교가 되었든, 인도적 대북지원이 되었든 이 긴 겨울은 꽤나 더 갈 것 같다.



손승호 박사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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