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으로 출발한 개신교를 개혁하라

개혁으로 출발한 개신교를 개혁하라

[ 논설위원칼럼 ]

정종훈 교수
2022년 10월 31일(월) 08:21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했던 것은 개신교를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자 했을 뿐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루터의 반박문을 신학 논쟁이나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으로 받아들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교회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고 파문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영주들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동하면서 루터의 반박문은 교회의 역사와 세계 역사를 바꾸는 도화선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영어로 'The Reformation'이라 표현하는데, 이 말의 어디에서도 '종교'라는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말 그대로 개혁이라는 말인데,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이다. 루터를 비롯한 칼뱅이나 츠빙글리 또는 뮌처 등 일련의 개혁자들이 노력했던 것은 모든 종교의 개혁이 아니라, 당시 그들이 속했던 가톨릭교회의 개혁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종교개혁을 '교회개혁'이라고 표현하든지, 서구사회가 사용하는 중립적인 용어 '프로테스탄트 리포메이션(Protestant Reformation)'처럼 '개신교 개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만일 가톨릭교회까지 포함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교 개혁'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개신교회가 '기독교'를 독점하려는 것 역시 재고해야 한다. 요즈음 대중매체나 여론조사 에서 '개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초대교회 이래로 모든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면서 교회에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등장했고, 1517년 이후에는 개혁자들의 활동과 함께 개신교회가 등장했다. 그리고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 무효소송을 계기로 교황청과 갈등했던 영국에 국가교회인 성공회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기독교의 주요 종파로서 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 성공회가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는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폭력적인 전도와 전 모 목사로 대변되는 극우 태극기 집회, 성 소수자들에 대해서 극렬히 혐오하며 드러내는 차별금지법의 반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생존을 위협받으며 우리를 찾아온 제3세계 국가의 난민들에 대한 거부, 신천지나 통일교를 비롯해 국내에서 자생한 사이비 이단 발흥의 배경, 분단 시대 한가운데서 화해보다는 원수 관계를 강화한 교계의 반공주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보다 앞세웠던 교회 집회의 자유, 맘몬이즘 영향 하에서 행해지는 성장 우선주위 뒤에 각종 부패한 교회 정치 등이 개신교회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주요 종교들 가운데서 바닥이다. 개신교 인구가 전체인구의 20%나 되는데도, 신뢰도가 20% 미만이라면, 개신교인들조차 자신이 고백하는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여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회생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면 역사에서 사라진 종교들의 뒤를 따를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제 우리 개신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믿음의 행함과 행함의 믿음을 사랑으로 실천하고자 한다면, 권력자나 부자들보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주고자 한다면, 나아가 이웃 종교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서로 협력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노력들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교회 개혁의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종훈 교수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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