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가 아니라 '뽈레 뽈레'

'빨리 빨리'가 아니라 '뽈레 뽈레'

[ 논설위원칼럼 ]

박종숙 목사
2022년 08월 15일(월) 08:12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군웅할거로 인해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일본의 '전국 시대'(1467~1603)에 소위 '3대 천하인'이라 불리는 세 명의 장수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일본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라면, 통일된 일본 천하를 실제로 손에 넣은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런데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고 최후의 패권을 잡은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40년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에도(지금의 도쿄)에 본거지를 둔 '에도 막부 시대'를 열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한 1868년까지 약 260년간 일본을 평화롭게 통치하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가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결단력을 갖춘 전형적인 용장이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략과 용인술이 뛰어난 전략가였다. 이에 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다림과 인내의 화신이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 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언젠가는 자신의 때가 올 것을 믿으면서 그때를 기다렸다.

이 세 사람의 성격과 리더십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 사람은 각각 단시로 이렇게 응답한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 사람은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응답은 얼핏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의사결정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이 요구되는 시대에,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지금 우리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지식혁명의 시대이다. 신속한 정보 획득, 냉철한 분석과 판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생존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신학과 교회, 그리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 한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을 지키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되, 세상에 동화되어버려서는 안 된다. 세상의 변화에 압도되어 버리면 생존에 급급하여 허우적거리면서 세상을 따라가게 된다. 이런 때일수록 영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여유와 초월의식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자세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조급증과 충동을 다스릴 수 있는 내면의 강한 절제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산(5895m)에 올라간 일이 있다. 일정상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킬리만자로를 올라가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뽈레 뽈레"이다. 스와힐리어로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이다. 욕심을 부려 빨리 올라가면 몸이 적응할 시간을 갖지 못해 고산증이 오게 된다. 고산증이 오면 천하장사라도 견디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하산해야만 한다. 변화의 한가운데를 통과할 때일수록 하나님의 때에 대한 확신과 기다림,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초월과 여유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박종숙 목사 / 전주중부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