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

[ 논설위원칼럼 ]

이홍정 목사
2022년 03월 21일(월) 08:41
정점을 향해 치닫는 코로나 감염병과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앞에 망연자실한 채 열병을 앓듯이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자극하며 퇴행적으로 전개된 이번 선거는 현자의 도덕정치와는 거리가 먼 정치권력의 민낯을 천하에 드러냈다. 냉전적, 교조적, 전체주의적 언어로 적대적 감정을 자극하며 만들어낸 0.73%의 차이는 국민통합의 큰 과제를 남겼다. 민주시민의 희생적 참여로 진보를 이룬 주권재민의 역사에 기대어 살아온 대한민국의 정치가, '동물농장'을 재현하듯 '여전히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는가'라는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다.

산불이 진화될 무렵 봄 비가 내렸고 건조주의보가 해제되었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은 찾아왔지만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은 '설국열차'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다시 갈등과 분열의 '겨울 공화국'으로 회귀하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에 강화되는 신냉전의 위기, 힘에 의한 평화의 위기, 원전 르네상스와 기후위기, 사회경제적 차별과 불평등의 위기, 성별 세대별 갈등의 위기, 노동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사법 권력의 위기 등 미증유의 아노미현상이 증폭되고 있다.

역사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성찰하고 참여해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난 겨울은 '하나님의 동면' 혹은 '하나님의 휴가'를 상상하며 탄식하는 시기였다. 인간의 탐욕이 쌓아 올린 문명의 바벨탑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아수라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부재'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는 겨울 잠에 빠지신 하나님도, 휴가 중이신 하나님도, 부재 중이신 하나님도 없다. 다만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의식이 진영의 동굴에 갇힌 채 겨울 잠을 자고 있거나, 인지부조화의 오류를 모른 채 자기만족적 '내로남불'의 휴가를 즐기고 있거나, 하나님의 역사 변혁적 정치의 길에서 이탈하여 부재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주권자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복음이 지닌 보편적이며 공적인 가치를 민주정치의 공론장을 통해 구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닮아가는 사회를 건설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얻은 나름의 선거 결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복음적 가치의 토대 위에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환골탈태의 자세와 자기 비움의 영성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치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위기를 정의로운 전환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생명의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공존의 한반도, 모든 인간의 존엄이 차별 없이 존중 받는 평등사회, 생태정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복음적 가치의 소통은 진영의 동굴에서, 인지부조화로 비롯된 '내로남불'의 늪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한 개방성을 가지고 이웃의 다원적 타자성을 포용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는 이 같은 복음적 가치의 소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임재를 경험한다. 복음의 가치는 진영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이해관계를 넘어 치유되고 화해된 생명공동체로 우리를 이끈다. 미완의 해방 77년, 분단체제 하에서 형성된 냉전적, 교조적, 전체주의적 마음의 지질학을 극복하고, 상호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상호보완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치유되고 화해된 마음의 지질학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 복음이 지시하는 바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향한 거룩한 순례의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이홍정 목사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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