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작은자 운동 45년'

여전도회 연재 '작은자 운동 45년'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11월 21일(목) 09:25
소외된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찾아가서 돌보는 여전도회 '작은자운동'이 올해 설립 45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대표이사:홍기숙)이 지난 10월 7일 마련한 '작은자 운동 45주년 및 사회복지법인 설립 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된 작은자운동의 역사, 교회사적 의미, 사회복지 기여도, 앞으로의 추진과제 등에 대한 3인의 강연문을 연속 게재한다.



작은자운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이승재 국장



Ⅰ. 작은자운동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은 지난 45년간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찾아가서 돌아보는 "작은자운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 앞으로 "작은자운동"이 더 많은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본연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지난 4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작은자운동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 보고자 한다.

1. 작은자운동이 시작되는 시대적 상황

작은자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정치으로는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 역시 지속되고 있었으며, 6.25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그 상흔이 연속되어지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먹고 살아가는 의식주의 문제가 우선순위 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박정희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농어촌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서울은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 못해 결국 이주민들은 청계천, 송정동, 봉천동 등지에 움막을 짓거나 심지어는 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도시 빈민의 문제는 단순히 주거적인 측면에서만의 문제에서 아동의 문제, 교육의 문제, 문화의 문제, 보건의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인들 중 몇몇의 사람들은 이 상황을 신앙적인 문제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노정현 박사는 독일로부터의 후원을 통해 연세대학교 내에 "도시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도시빈민들의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 1기생들인 김진홍, 황화자, 최규성 등이 1기생으로 추후 작은자운동에 연결되어 각 지역에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주선애 교수를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지역사회 속으로 들어가 말씀만이 아닌 행동으로 지역사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 섬김이 작은자운동에 투영되었고, 작은자운동을 펼치는데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2. 작은자운동의 시작

작은자운동을 기록한 지금까지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줄곧 모든 자료에 작은자운동이 시작된 연도를 1974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근거는 김진홍 목사(현재 동두천두레공동체 대표)가 청계천 송정동 등지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과 특별히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청계천 송정동 등지에 4곳의 어린이집을 설립하게 된다. 어린이집이 설립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화여대와 숙명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부모들이 직장에 출근하면서 초등학생들이 방과 후에 방치되고, 심지어는 청소년들이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배움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김진홍 목사는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주민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사회학교를 세워 '배달학당'이라 명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하였지만 어린이집과 '배달학당'을 운영하는 일에 경제적인 부담은 매우 컸다. 김진홍 목사는 그 때의 가난과 배고픔, 매일 수제비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시간들의 아픔으로 오늘까지 수제비를 먹지 않을 정도였다.

이때 일본의 모토유키 노무라 목사를 불러 독일 아동복지기관인 KNH(Kindernothilfe..V) 로 보내 후원요청을 하게 된다. 노무라 목사는 가재도구와 자신이 아끼던 전축과 미국 유학시절 사용하던 신학원서 등을 팔아 독일로 갔고, 독일로부터 담당 총무였던 보스홀드가 한국에 오게 되고, 1974년 독일 KNH의 후원을 지원받게 된다.

정부는 청계천을 복개하는 계획을 세우고, 청계천의 사람들을 남양만으로 이주시켰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독일 KNH로부터 지원되는 후원금으로 남양만 6개 지역 교회내에 어린이집을 계속 운영하게 된다. 김진홍 목사는 청계천의 사람들과 삶의 터전을 남양만으로 옮기면서 자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자립의 일환으로 호주로부터 젖소를 들여와 보급하는 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하지만 수입원장이 잘못 전달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KNH와 일본의 모토유키 노무라 목사는 그동안 독일 KNH로부터 지원받은 후원금에 문제가 있는지 특별 감사를 실시하게 된다. 인천 산업선교의 일환으로 운영되던 기독교장로회 소속 은석유아원 이명숙 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독일에서 온 KNH 특별 감사관은 KNH로부터 지원받는 아이들의 파일을 요청하고는 오랜 시간 파일에 기록된 아이들 사진과 프로그램 중에 있는 아이들을 대조하고는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김진홍 목사는 독일 KNH가 지원하는 어린이집 행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때 모토유키 노무라 목사는 김진홍 목사의 역할을 대신하여 황화자 전도사를 KNH 한국 담당 코디네이터로 추천하게 되고, 1980년 6월 황화자 전도사가 남양만 6개 어린이집 코디네이터로써 작은자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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