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정기총회 김윤태 교수 특강<2>

여전도회 정기총회 김윤태 교수 특강<2>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10월 17일(목) 09:18
5. 종교개혁 이후 19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선교 및 친교를 통한 교회의 일치

1) 복음주의연맹: 유럽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효시

기독교 연합 에세이: 1845년 스코틀랜드에서 나온 책자로써 일치와 재연합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며 일종의 복음주의 연맹을 최초로 요청하였다.

독일의 단쥑: 1842년 각 교파의 지도자들을 만나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과 순수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영적 연합체 구성을 제안하였다. 이 연합체는 마치 연방제와 같이 어느 한 교파가 지배적이어서는 안 되고, 각 교파가 자기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복음주의 연맹의 출범: 1846년 8월, 마침내 52개 교파에서 온 800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가운데 런던에서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인 복음주의연맹을 발족시킨다. 그 뒤 1851년 대 박람회 때 영국 런던에서, 1873년 남북전쟁 직후에 미국 뉴욕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2) 교파 및 초교파별 연맹

개신 교단 연맹들의 출범: 1867년 성공회협의회, 1875년 세계장로교회연맹, 1881년 에큐메니칼 감리교회연맹, 1891년 회중교회연맹, 1905년 세계침례교회연맹.

초교파 연맹: 1889년 세계주일학교연맹, 1855년 기독교청년연합회 YMCA, 1894년 기독교여성청년연합회 YWCA

학생 자원 운동: 1886년 대학생 해외선교운동, 1895년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6.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

1) 국제선교사대회

윌리엄 캐리에 의해 1806년 5월 인도 사역 13년째 1810년 세계선교사대회 개최가 제안됐다. 침례교 선교부 총무 Andrew Fuller는 유쾌한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0년대부터 점차 선교사들의 친목 및 식사 모임이 시작되었다. 1825년 11월 인도 봄베이에서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최초로 시작했다.

지역별 선교사대회의 시작: 1855~1863 북인도선교사대회, 1858~1900 남인도선교사대회, 1872~1902 전인도선교사대회 (10년마다), 1877~1907 중국선교사대회, 1907년 상하이중국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 선교사대회.

세계선교사대회의 시작: 1888년 제1차 런던 세계선교사대회 (139개 선교회, 1579명 선교사 참석), 1900년 제2차 뉴욕 세계선교사대회 (162개 선교회, 2500명 선교사 참석).

2) 1910년 에든버러 제3차 세계선교사대회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의 뉴칼리지 건물에서 159개 선교단체가 파송한 세계 각처로부터 모인 1200명 이상의 세계 선교 관련자들이 참가하여 열린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WMC)는 19세기 선교 및 연합운동의 총 결산이요 20세기 선교 및 연합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대회는 제 3차 세계선교대회로서 그 이전의 선교대회와 연속선상에 있으나, 여러 측면에서 그 이전의 대회들을 능가하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적 대회로 받아들여진다. 이 대회는 당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는 의지로 거의 모든 개신교 교파 출신의 선교 기관들과 이른바 신생 교회로부터(17명의 대표) 모여든 1200명의 대표들이 결집한 최초의 선교대회였다.

7. 20C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

1) 국제선교협의회

국제선교협의회(IMC) 탄생 배경은 1888년 런던 세계선교대회 때, 당대의 유수한 선교학자인 바르넥이 모든 선교 단체를 하나의 기구로 통합해 만들자고 주장했는데, 이 제안들이 1910 에든버러 WMC를 뒤잇는 계속 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차 대전으로 인해 잠시 계획이 흐지부지 되었다가 종전 후 1920년 스위스 크랑스에서 국제선교 모임이 회집되면서 다시 추진되었는데, 이때 국제선교위원회 구성안을 작성해서 각 국가별 선교단체에 제안하였다.

1921년 뉴욕 모홍크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출범했다. 14개국 61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열렸다. 이중 7명이 신생교회 대표들이었다. 마침내 바르넥과 1910년 에든버러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모홍크 IMC 대회에서 명칭이 "국제선교위원회"에서 "국제선교협의회"로 바뀌었다. 1961년 WCC에 흡수 통합됐다. 1961년 뉴델리 WCC 총회에서 드디어 IMC가 WCC에 합류되면서, 세계선교 및 전도국으로 전환된다. 이로 인해 IMC는 협의적 역할을 넘어서 교회 차원에서 선교 활동과 신학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 생활과 실천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모순에 찬 현대사회와 복잡한 국제 관계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책임을 통감하면서 일으킨 운동이다. 1920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15개국으로부터 약 90명의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준비대회를 가졌다. 1925년 8월 19일부터 30일까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제1차 생활과 실천대회가 37개국 6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의의 주 의제는 복음을 삶의 모든 영역(산업, 사회, 정치, 국제)에 적용시키는 일, 여러 가지 경제 문제를 검토한 뒤 정의 및 인권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전 세계에 촉구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교회밖에 있는 곳곳에서 진리와 정의를 찾는 젊은이들과 노동자들과의 연대성을 강조하면서, 전쟁에 의한 위험과 파괴세력 하에 있는 세계 및 기계화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근로 계급을 위하여 복음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일 등이었다.

3) 신앙과 직제

미국 성공회의 감독이자 필리핀 선교사 브렌트의 하나의 연합교회에 대한 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신학 특히 성례전과 직제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교회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신앙과 직제 문제를 주 의제로 하는 세계대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1910년 에든버러선교대회가 끝났을 때 브렌트는 에든버러에서 논의되지 않은 신앙과 직제 문제를 다룰 또 하나의 세계대회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1927년 8월 3일 로잔에서 제1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가 열렸다. 참석 회원은 127개 교파의 대표로써 남자 385명, 여자 9명, 직원 12명이었다. WCC 출범 이후 신앙과 직제운동은 WCC 산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의해 수행되었다.



김윤태 겸임교수 (대전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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