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

다시 시작하는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

[ 시론 ]

유영식 교수
2019년 07월 01일(월) 14:49
그리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스킬라(Scylla)와 카리브디스(Charybdis)라는 괴물들이 나온다. 이 괴물들은 오디세우스가 배를 몰고 지나가야 하는 해협의 양쪽에 하나씩 살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부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지나가야 하는 왼쪽에는 무시무시한 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소용돌이 물길이 있어서 어느 쪽으로도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면 배는 조각조각 부서지게 되고 소용돌이를 만나면 배는 완전히 침몰하여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모두 바다에 삼킨 뒤 주검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배를 통째로 침몰시킬 수 있는 소용돌이 괴물 카리브디스를 피하고 일부만을 희생시키는 스킬라를 택해 무사히 해협을 통과하게 된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 이후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한마디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갇혀 버린 상황으로 요약된다. 교착국면을 너무 방치하면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상실할 잠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과도하게 대립하게 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위험에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관련국가 모두에게 이번 해협을 어떤 방식으로 헤쳐 나갈지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남·북·미 정상들이 하노이 이후 122일 만에 전쟁과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전격적으로 회동했다.

너무나 파격적이었던 이번 북미 판문점 회동은 남·북·미·중 4개국 모두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여 상호간의 이해와 수요를 일정수준 만족시키고, 어차피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이기기 쉽지 않은 게임에서 서로의 이익과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방법으로 교착국면의 출구를 모색했다는 점에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일각에서 이번 회동이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제안에서 시작된 점과 외교 관례를 깬 드라마틱한 형식에 주목하면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53분 동안 사실상 '회담' 성격의 회동에도 실무회담 개최 합의 외에 실질적으로 얻은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북미의 입장차가 분명하기에 실질적인 비핵화로 이어질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미 판문점 회동을 일회성 이벤트 행사로 보는 것에는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북·미 판문점 회동은 '세기의 만남'이라는 상징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를 위해서는 전략적 유연성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노이 협상이 노딜(no deal)로 끝나고, 미국은 2020년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면서 북한이 고강도 도발을 하지 않는 선에서 북·미 교착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지 손실이 될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북한은 66시간 하노이 대장정이 실패하면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이를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배수진을 치고 미국의 전향적인 태도변화를 압박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대화를 통해 북·미 협상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려는 남한으로서도 북·미 교착의 장기화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미·중 무역전쟁에도 중국경제 양호를 자신하며 공세적인 입장이었지만 홍콩 시위사태가 부상하면서 미국과의 확전보다는 협상 재개 쪽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국면에서 먼저 자신의 패를 노출하면 진다는 생각으로 버텨보려던 관련국가들이 최종적으로 유연성을 회복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향후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의 과정도 지난(至難)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똑바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구불구불 돌아갈 때도 있고, 때로는 멈출 때도 있고, 때로는 후퇴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화 외에는 평화를 이룰 방법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관련국가들이 국내정치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대화만이 해결책이라는 유연성을 확보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합의에 있어서 지금보다 더 진전된 결과물도 분명 생산될 것이다.

유영식 교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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