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성의 봄

다시 영성의 봄

[ 주간논단 ]

이은주 목사
2019년 05월 21일(화) 10:00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산고(産苦)의 시작일 뿐이다 (막 13, 8b)."

세 번째 밀레니엄의 이십년이 지나고 있다. 밀레니엄이란 시대적 특징과 잦은 자연재해 현상과 맞물려 인류멸망을 플롯으로 한 다양한 문화적 상품들이 소비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종말론 소재의 영화들, 둠스데이, 인터스텔라, 매드맥스, 좀비물 등은 핵전쟁, 또는 기후와 식량 문제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인류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그럴싸한 시나리오로 마치 미래에 이런 현실이 펼쳐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종말론적 플롯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어디선가 핵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도, 어느 대륙에선가 식량과 자연재해 등 큰 재난이 몰려와도 마치 이런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숙명처럼 정해진 역사의 과정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어린 세대들은 이런 문화상품들을 접하면서 어떠한 미래를 상상하게 될까? 어쩌면 미래가 없는 세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선다. 또한 교회는 종말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맞았던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일어난 문화적, 영성적 역사를 추적한 레이첼 풀턴의 'From Judgment to Passion: Devotion to Christ and the Virgin Mary, 800-1200'이란 책은 종말론적 시대상과 영적 성숙의 관계에 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 글에서 풀턴은 밀레니엄이 가져다준 묵시적 암울함과 죽음의 욕동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세밀히 살핀다. 간단하게 보면 가장 먼저 수도원 운동의 발흥이 있다. 종교적 희생과 금욕이란 방법으로 종말론적 '신의 심판'인 파국을 막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에 짓눌리고, 역병이 돌거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면 이를 신의 심판과 재앙으로 여긴다. 이렇듯 밀레니엄을 전후한 시대의 묵시적 환경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유형의 영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심판하는 아버지 신'을 막아 설 '어머니'의 도래이다. 풀턴은 당시 성모에 대한 광범위한 신앙과 예수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이 수도원적 금욕의 영성을 대신하였고 이 영성이 두 번째 밀레니엄의 종말론적 암울함을 걷어내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용서, 품, 사랑, 일치와 영생과 같은 언어들 위에서 사람들은 다시 생기를 띄고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중세의 하늘을 뒤덮은 종말의 공포가 역설적이게도 '영성의 새봄'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것이다.

세 번째 밀레니엄의 도전은 분명 1000년 전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핵전쟁의 가능성을 포함하여 언제든 문명의 붕괴와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거운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하지만 필자는 풀턴의 역사분석처럼 지금의 위기 또한 또 다른 '영성의 봄'을 불어올 계기가 되지 않을까 희망을 감히 품어본다. 심판에서 사랑으로 영혼을 옮겨 죽음을 극복한 중세인들처럼 우리도 힘숭배와 패권주의 등 낡은 것들을 버리고, 생명 평화의 영성으로 새천년의 성숙한 문명을 열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와 희망에 설레기까지 한다. 교회의 종말론적 가르침이 폭력적 이미지로 채워진 것이 안타깝다. 나쁜 상상력이다.

폭력적 종말론을 거부한다. 역으로 이런 폭력의 문화는 반드시 그 끝을 맞을 것이란 의미의, 또한 낡은 세계를 지탱해온 가부장적 세계, 힘과 경쟁과 전쟁을 숭배하는 세계가 그 끝을 맞을 것이라는 의미의 변혁의 종말론을 상상한다. 이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미래가 아니겠는가. 핵무기 종주국인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종말론 플롯의 문화 상품들을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우리를 돌아보며 비판적 읽기를 통해 우리 자녀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의지도 덧붙여본다. 전쟁이 나지만, 지진이 나지만, 기근이 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산고의 시작일 뿐이다. 평화의 새날, 영성의 새봄을 낳을 산고임을 믿으며!

이은주 목사/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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