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한국기독공보
2019년 04월 18일(목) 10:50
교회 안 정치: 여장로 제도 청원을 중심으로

함남연합회는 당시 회장 최영혜가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교회 발전과 선교 사업 확장을 위하여 지도자적 위치에 있어야 함을 인식하고, 여장로 제도 허락 청원을 소속 노회인 함남노회에 제출하였다. 노회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고 결국 평북 선천읍 남교회에서 열린 제22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933년)에 여장로 청원을 헌의하였다. 그때가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설립된 지 5년째 되는 해이며 초대 지회인 평양 널다리골교회 여전도회가 조직된 지 35년이 지난 해였다.

그러나 이 청원에 대하여 총회는 정치 제5장 제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간단히 일축해 버리고 말았다. 여장로 청원 문제는 총회에서 기각되었으나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1934년 9월 총회를 앞두고 김춘배 목사가 "여권문제"라는 제목으로 여장로 제도에 대한 타당성을 논한 글을 '기독신보'(1934.8.22)에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2~3년간 논쟁이 계속되었다.

1933년 제안된 여장로는 61년이 지난 1994년 제79회 교단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우리 사회와 교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제도는 완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리더십은 이러한 완고함을 사랑과 인내로 견뎌왔고, 성경적·신학적 설득과 기도라는 모성적 리더십의 실천을 통하여 결국 변혁의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신앙과 경제

가. 교회 밖 경제: 국채보상운동을 중심으로

구한말 당시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망국차관은 1300만원에 달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현실 문제를 타개해 보고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금연운동을 일으켰다.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고 보상금을 하사하였다. 이어 부인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도 이 운동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먼저는 차관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는 목적을 세웠으며, 이러한 경제/정치적 해결을 통해 결국에는 남녀평등을 이루고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그 중 부산 좌철리에서 조직된 여성들의 감선회(減膳會: 반찬 줄여 먹기 운동)의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지라 외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대한 강토 3천리를 보존키 어려워라 월남(越南)과 애급은 외채로 국토를 견탈(見奪) 당하고 인민이 진멸되었으니 전감불원(前鑑不遠)이다. 충군애국 지심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 우리가 살림을 절용하여 조석 반상기에 매일 3,4푼만 감하여도 일월지간에 남는 것이 신화가 10전 가량이나 될 것이니 다소를 불구하고 성심 합력 국토를 안전히 하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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