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 논설위원칼럼 ]

박근호 목사
2018년 10월 15일(월) 11:01
자식이 결혼하여 조부모가 되면 손주 사랑이 극진해진다. 노인들께 "자식이 더 예쁜가, 손주가 더 예쁜가"를 물었더니 '손주가 더 예쁘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이어서 "자식보다 손주를 더 예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혹자는 "자식 키울 땐 사는 게 힘들고 바삐 사느라 여유가 없어서 예쁜 줄도 모르고 키웠는데 손주는 그게 아니라서 예쁘다"고 했고, 혹자는 "자식을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애정표현도 다 못하고 엄하게 키웠는데 손주는 그냥 사랑만 주면 되니까 예쁘다"고 했다. 혹자는 "직접 키우는 게 아니라서 매일 보지 않고 가끔 가다 한 번씩 보게 되니 예쁘다"고도 했다. "오면 반갑고, 갈 땐 더 반가운 게 손주"라지 않던가.

개중에는 "자식들이 자라면서 부모 속 썩인 걸 내 자식놈들에게 그대로 갚아줄 손주 녀석들이라서 예쁘다"는 기상천외한 대답도 나왔다. 그 분 왈, 한 번은 속이 상해 속 썩이는 아들을 향해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 너도 너랑 똑같은 자식새끼 낳아서 나처럼 고생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그래서 제가 결혼을 안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저 힘든 거 어머니께 안보여 드리려구요"하더란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손주를 '예뻐'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손주랑 자식은 비교 자체가 안된다.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과 손주는 기본적으로 '비교 불가'이다. 그럼 왜 손주를 예뻐하느냐? 자식이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다.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손주를 봐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낳은 아들'과 '며느리가 낳은 손주'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어리석다. 어느 어머니는 "아무리 손자가 이뻐도 내 자식 힘들게 하는 건 싫다. 손자 손녀가 아무리 예뻐 봐야 내 자식만 하겠느냐?"고 일갈한다. 부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진실이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한다. 이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증거이다. 인간의 사랑은 본질상 이기적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없기에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죽음)'을 말씀하셨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이런저런 명분을 갖다 대며 서로 자기 입장을 밝힌다. 때로는 사랑의 명분으로, 때로는 정의의 명분으로. 그러나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그것 또한 이기심과 자기중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노회가 가까워져 오면 전에 그렇게 좋다고 고쳤던 규칙을 다시 고치자고 한다. 그러나 냉정히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 보자. 법과 규칙이 문제인가 그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는 인간이 문제인가? 불과 얼마 전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치던 자들이 이제는 '통일은 쪽박'이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기준의 상실이 세상과 교회를 혼란케 한다.

역사는 언제나 진리이신 하나님이 맞고 이기적인 인간이 틀려왔다. 그래서 바울은 단언하여 자랑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절).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나로 사시는 것이 시대의 희망이요 해법이다. 자기 부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자들에게 축복있으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주님의 생명을 분양받아 진리 안에서 자유한 거듭난 새 피조물에게 축복있으라!



박근호 목사/구미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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