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선교사 아닌 '나'는 없다

러시아 선교사 아닌 '나'는 없다

[ 땅끝에서온편지 ] <3>선교사로서의 축복

정균오 목사
2017년 12월 26일(화) 15:09

1993년 봄에 아내는 정연희 씨의 '양화진'을 말없이 구입하여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죽어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책이다. 책을 감동적으로 단숨에 읽었다. 책을 읽고 나서 양화진을 직접 방문해 보고 싶어졌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5월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묘지를 방문하였다. '양화진'에 쓰여 있는 선교사들의 묘비에 적힌 글귀와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묘비에는 한국에 들어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이 얼마나 우리 민족을 사랑했는지 나타나 있었다. 길을 따라서 걷다가 양화진 한쪽 구석에 0세부터 1세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를 발견했다.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에는 성경구절이나 다른 말이 없이 언제 태어나서 사망한 날짜만 기록되어 있다.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요동치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사랑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척박한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와 자녀들까지 희생을 해야 했는가?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라"고 고백하며 목회의 길을 가고자 했던 헌신된 마음은 어디가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선교의 길은 피해서 가고자 하는가? 그때 필자는 선교사 자녀의 묘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선교사 자녀들은 어려서 죽어서 무덤에 묻혔지만 지금도 살아서 나에게 선교를 향한 도전을 주는 듯 했다.

1993년에는 새문안교회 교육1부 전임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그 때 새문안교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를 보내어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기독공보를 통해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원하는 적절한 선교사를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김동익 목사님이 부교역자 중 한 사람이 러시아선교사로 헌신하여 나갈 것을 도전하셨다. 그러나 갑작스런 도전에 각자의 비전과 사정이 있어 어떤 교역자도 목사님의 도전에 응답할 수 없었다. 필자는 당시 교역자 중 가장 막내였다. 목사님은 내게도 러시아 선교사로 나갈 것을 도전하셨다. 그러나 당시 그 도전에 응답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아내가 매우 아픈 상태에 있었고, 둘째는 공부를 더 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약 6개월 동안 계속해서 선교사로 나가면 좋겠다며 도전하셨다.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큐티를 하다가 "네가 건너가서 밟는 땅을 네게 주겠다"는 응답을 받고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에게도 선교사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열악한 선교지에서 아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공부를 더 하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 없어 선교사로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양화진'을 구입하여 내 책상에 올려놓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양화진을 방문하여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 앞에서 큰 충격을 받고 진지하게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 앞에서 느꼈던 부끄러움과 선교사 자녀들이 아직도 살아서 나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후 3일간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다. 금식 3일째 아침에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하시는 음성을 마음에 들려주셨다. 그 음성을 듣고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부족하지만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며 선교를 향한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내의 건강과 공부하고자 하는 계획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1994년 7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선교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1년간 언어를 공부한 후 95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여 1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고 국가에 등록하고 학사(學舍)를 건축했다. 그리고 2003년 안식년 후에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로 선교지를 옮겨 문화센터 '세상의 빛'을 건립하고 러시아 현지교회 및 고려인 협회와 협력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33살에 시작된 선교의 삶이 벌써 23년이 지났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떠난 길인데 하나님께서 죽이시지 않고 살려 주셨고 나의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지난 세월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결혼 6년 만에 두 자녀를 주셨다. 그리고 선교학 박사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기도와 후원의 끈을 이어가며 선교를 동역하고 있는 후원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지속적인 기도와 사랑과 신뢰에 감사를 드린다.

어느 영화배우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선교는 나에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것이다. 러시아 선교사가 아닌 나 자신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나는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처럼 러시아 민족과 고려인을 사랑한다. 선교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선교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선교지에 살아보면 선교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임을 누구나 경험한다. 필자 역시 러시아에서 살면서 부당하고 황당한 일을 수없이 당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러시아를 사랑하고 고려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정균오 목사/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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