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 개혁 … 오늘의 사명

믿음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 개혁 … 오늘의 사명

[ 기고 ]

최신한 교수
2017년 10월 31일(화) 15:26

루터의 종교개혁은 역사적 사건을 넘어 개혁신학의 출발점을 이룬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루터의 개혁사상을 근대정신에 부합하게 발전시킨 근대 신학의 아버지이다.

계몽주의에 의해 소멸 위기에 처한 종교를 되살려낸 슐라이어마허는 교회를 부패의 늪에서 구한 루터와 같은 길을 걸었다.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을 통해 종교와 믿음을 재건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체계화한 것이다.

루터는 믿음과 성경년 은총을 강조했다. 믿음은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경건한 마음이다. 신앙인은 회개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겸손의 인식에 도달한다. 

말씀은 문자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으로 믿는 자를 실존적으로 변화시킨다. 은총은 믿음처럼 인간 바깥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개혁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에 맞서는 것은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사고는 이론체계를 정립하며 의지는 도덕과 행위공적을 쌓는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와 신앙을 이러한 자발적 능력에서 철저하게 떼어내려고 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인간의 자발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수동적인 체험에서 나온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형이상학 및 도덕과 구별된다.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의 근거와 필연성을 밝히려는 사유의 결과이다. 도덕은 행위의 의무와 금지를 규정하는 의지의 의물이다. 이에 반해 종교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고 감동 받는 내적 체험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며, 인간의 자발성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절대의존감정이다. 이것은 '종교론'과 '기독교신앙'의 핵심주장이다.

믿음의 자리는 체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내면성이다. 내적 확신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공통분모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전적으로 앞서며 그에게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앞서 하나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믿음은 이 의존성에 대한 내적 확신이다. 내적 확신은 말씀과 함께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말씀이 내면성 가운데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은 문자나 의문(儀文)로 머물지 않고 영적 생명이 될 때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초월적 말씀은 땅에 매인 인간에게 선포될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한다. 말씀을 듣는 귀는 몸과 영혼이 어우러진 능력이다. 이 능력이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몸과 영혼의 초월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루터가 강조한 말씀을 절대의존감정에서 일어나는 삶의 초월로 해석한다. 이 초월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삶으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와 말씀을 통해 새롭게 규정된 자기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죄에 묶인 인간의 삶이 말씀을 통해 의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의존감정이 루터 사상의 근대적 변형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내적 확신은 실존적이다. 믿음은 실존적 체험 및 결단과 무관할 수 없다. 자기만의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 믿음은 추상적 교리에 맹종하거나 사이비 권위에 휘둘릴 수 있다.

율법을 능가하는 믿음(루터)은 신앙적 체험(슐라이어마허)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루터와 슐라이어마허는 시대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신학과 믿음의 대가들이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21세기 신앙인들은 시대의 위기에 맞서 무슨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를 개혁하는 일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를 계승하는 신앙인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최신한 교수 한남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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