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몽당연필

[ 목양칼럼 ]

김형만 목사
2017년 10월 25일(수) 13:42

테레사 수녀가 인도 방갈로르의 한 신학교에서 강연할 때 자신을 '몽당연필'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몽당연필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다.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성능 좋은 연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연필 깎는 것조차 귀찮다며 샤프연필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어디 연필 뿐일까? 볼펜도 굵기에 따라 얼마든지 골라 쓸 수 있도록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옛날에는 교회에서 연필이나 공책을 상품으로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았다.

연필이나 공책이 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얼마나 시시하게 아는지 주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그 상품을 받고 좋아하기는커녕 "좀 좋은 걸 주지…" 하며 서운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언젠가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이 '게임기'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옛날에는 연필을 손에 들고 있는 시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게임기를 손에 들고 있는 시간들이 많아 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있어서 오늘의 시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필통 속에는 연필과 칼 그리고 지우개가 있었다. 좀 괜찮게 사는 집 아이들은 새 연필 두 세 자루가 필통 속에 있었는데 그것을 열어 보이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새 연필을 처음 깎을 때 감격은 말로 할 수 없다. 어떤 연필은 질이 좋지 않아서 조심조심 글씨를 써도 잘 부러졌다. 그러나 어떤 연필은 질이 좋아서 글씨가 잘 써지므로 아끼고 또 아꼈다.

안타까운 것은 질이 좋은 연필일수록 자주 깎아야 하기 때문에 점점 작아진다는 것이었다. 너무 작아져서 몽당해지면 그것이 곧 몽당연필이다. 그런 몽당연필이 너무너무 사랑스러워 대나무에 끼워 쓰기도 했었다. 너무 작아져서 버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연필로 숙제를 해서 동그라미 다섯을 받거나, 시험을 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더 없이 행복해지기도 했었던 것이다.

물론 몽당연필이 동그라미 다섯을 받게 하거나 좋은 점수를 받게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 몽당연필은 나에게 붙잡혀 쓰임을 받았을 뿐이다. 테레사 수녀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을 몽당연필이라 하였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나 자신도 몽당연필과 같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꿈이야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크고 높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은혜를 받고 주의 종이 되려고 했을 때 나 자신이 한 없이 작게만 여겨졌다. 수줍음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몽당연필과도 같았다.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교회를 섬기다 보니 누군가 나를 붙들고 쓰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었다. 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몽당연필과 같은 사람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쓰셨다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고 싶어졌다.

"하나님 아버지! 몽당연필과 같은 사람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붙잡고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비록 사람은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만 목사순창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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