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루터와 뮌스터/신구종교 갈등 첨예화...긴 전쟁 끝 화해와 평화로

<13> - 루터와 뮌스터/신구종교 갈등 첨예화...긴 전쟁 끝 화해와 평화로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김미강 선교사
2017년 10월 25일(수) 13:36
   

뮌스터는 재세례파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 지면에서는 루터와 재세례파의 관계와 갈등을 살펴봄으로써  뮌스터에서의 종교개혁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루터와 재세례파의 갈등
루터는 '재세례파(Wiedertaufer, Anabaptisten)'를 복음에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을 토마스 뮌쩌와 칼슈타트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자들의 새로운 추종자들이라고 여겼으며, 그들을 같은 부류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가 1524년에 소위 거짓 선지자라고 책망했던 자들과 같은 부류의 몽상가요, 열광주의자들이었다. 사실 그들의 신앙이란 이미 시행된 성례전(세례)을 불필요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가 효과가 없으며 복음의 모범을 따라서 성인이 된 신앙인의 세례가 유효하다고 주장했고, 유아세례를 배척했다. 세례의 효과는 받는 사람들의 믿음이 중요하며, 따라서 자각적인 믿음의 고백이 불가능한 유아의 세례는 세례로서의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는 우리가 세례받기에 충분한 신앙을 가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세례는 우리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무효화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고 반박하였다. 그 당시 재세례파들 중 많은 이들이 농민전쟁에 참여했으며, 뮌쩌의 천년왕국 사상에 감화되어 천년왕국을 이루기 위한 무력 사용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들 중 또다른 부류는 폭력에 반대하여 무저항을 맹세한 평화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소수의 세상과의 분리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만 살았으며, 권위에 대한 순종의 미덕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들을 피했다.
루터는 이들이 교회의 본질을 벗어났다고 비판하면서, 1528년에 두 명의 목사에게 보내는 두 개의 편지 형식으로 책을 썼는데, 재세례파의 이론을 무력화시키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뮌스터 사건
1534년, 뮌스터에서 재세례파들이 시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종교개혁운동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곧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뮌스터에서도 루터의 추종자들이 생겼으며, 그들의 숫자가 뮌스터 시의회에서 증가하는 추세였다. 정치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보수적인 개혁으로 시작되었으나, 뮌스터 출신의 설교자였던 베른하르트 로트만(Bernhard Rothmann)의 등장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그는 재세례파의 영향 하에 있는, 급진적인 포퓰리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 뮌스터는 천년왕국의 희망의 거점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설교자인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의 예언을 따르는 재세례파들이 북부 독일과 네델란드에서부터 모여들었다. 멜키오르 호프만은 뮌스터에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어야한다는 이상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들은 약 9000명 정도의 주민들 사이에서 강력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뮌스터에서의 종교개혁은 이미, 시의회와 설교자가 함께 경건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는,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의 급진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1534년 9월에, 카리스마적인 인물인 얀 폰 라이덴(Janvan Leiden) 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신정국가를 세우고,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전 시장이었던 베른하르트 크니퍼돌링(Bernhard Knipperdolling)을 그의 수하로 임명했다. 얀 폰 라이덴은 새로운 규정 하에서 총독과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통합한 지도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곧 쾰른의 대주교와 클레베의 가톨릭 교인인 공작, 헤센의 루터교인인 필립이 참여한 연합군에 의해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으면서, 뮌스터 주교가 뮌스터 시를 포위했다. 얀 폰 라이덴은 다른 재세례파 공동체의 지원을 받고자 사절단을 파송했지만, 뮌스터는 이미 고립되었고,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뮌스터 시의 모든 남자들이 방어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나, 주교들의 군대를 격퇴시키는 데 실패했고, 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제 라이덴의 종말론적인 경고가 현실이 되었다. 그는 총독과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얻었고, 스스로 자칭 염탐군을 참수하기도 했으며, 재세례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같은 위치를 다시 재현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1535년 6월에, 포위된 지 일년 만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얀 폰 라이덴과 다른 두명의 지휘관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1536년 1월에 참수되었으며, 그 시체는 성 람베르티교회(St. Lamberti-Kirche)의 철장으로 된 종탑에 전시되었다. 이 종탑은 아직도 남아있다. 정확하게 뮌스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하는 것은 어렵다. 승자와 재세례파의 대적자에 의해 전해진 내용이며, 뮌스터 시의 문서가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역사에서 크게 괘도를 벗어난 일로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일부다처제가 유입되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그러나 루터는 재세례파들의, 자신이 참된 신학적인 이론을 대변하고 있다는 오만함과 주장을 비판하면서도, 또한 그들을 '쾌락주의자'로 맹렬하게 비난하면서도, 또 일부다처제와 관련된 비판에서는 구약의 족장들이 일부다처제로 살았으며, 그러한 생활방식이 후에 중대한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베스트팔렌 조약
종교개혁과 관련된 뮌스터 역사는 종교개혁사에서 크게 괘도를 벗어났다고 평가할 만큼 끔찍한 사건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대략 100여 년 후인 1648년에 유럽 근대 국가의 수립의 초석이 된 베스트팔렌 조약이 수립된 곳이기도 하다. 독일의 30년 전쟁과 스페인과 네델란드 사이의 80년 전쟁이 종식된 곳이다. 중세 카톨릭에 기초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럽이 종교개혁의 여파로 긴 전쟁 끝에, 주권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기본정신은 '관용'이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긴 전쟁을 치르고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신앙을 관용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현재에 와서도 뮌스터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사이좋게 공존하며 교회의 일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이 관용의 정신이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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