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기도, 사랑의 심장으로 실천하는 행동들 있다면 "개혁은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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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11> - 루터 종교개혁의 진행과정 라이프치히, 슈말칼덴, 할레

손교훈 선교사
2017년 08월 22일(화) 13:38
   

종교개혁은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터 전에도 후에도 개혁자들이 있었고, 그의 당대에도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개혁에는 사람이 필요했고 조직이 필요했으며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루터 종교개혁의 진행 과정에 있어 각각 초기, 중기, 말기 및 그 이후를 대표하는 도시라 할 수 있는 라이프치히(Leipzig), 슈말칼덴(Schmalkalden), 할레(Halle)를 따라가며, 루터 종교 개혁의 과정과 의미를 더 잘 살필 수 있다.

I. 라이프치히(Leipzig)
라이프치히는 독일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의 '월요 기도회'로도 유명하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틴 루터(1483-1546)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루터가 1539년에 토마스교회(Thomaskirche)에서 설교한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루터의 종교 개혁 초기를 살피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도시이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 건 일은 작은 사건 같았지만 이 이슈가 학자 및 학생들 사이에 점점 크게 회자되면서 소위 '라이프치히 종교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1518년에는 루터의 동료 교수였던 칼슈타트(Karlstadt)가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가 우선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가톨릭 신학자인 요하네스 에크(Johannes Maier of Eck)가 공개 토론을 요청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519년에 루터는 현재 라이프치히 신 시청사(Neues Rathaus)인 당시 플라이센성(Pleißssenburg)에서 에크와 격렬한 설전을 벌이며, 구원 받기 위해 반드시 교황을 인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해야 하고, 연옥교리는 잘못이며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루터는 이 토론에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주장을 근거로 내세웠고, 에크는 후스가 이단으로 화형 당했음을 경고했다.

이 무렵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담은 소논문들을 써내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일 귀족에게 고함'(An den Adel deutscher Nation), '교회의 바벨론 포로'(Von der babylon Gefangenschaft),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등이다.

이를 통해 루터의 생각이 점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면서 에크는 루터를 불온한 인물이라고 교황에게 고발하게 되고 격분한 교황은 1520년 6월 '주여, 일어나소서'(Exurge, Domine)라는 교서를 통해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루터는 오히려 교황의 경고 교서와 로마 가톨릭교회 법전을 학생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고,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파문'(성직 박탈, 교회 출석 및 장례식 불가능)을 당한다.

II. 슈말칼덴(Schmalkalden)
아름다운 옛날 집들의 도시 슈말칼덴은 '작은 도시지만 큰 역사를 가진 도시'(Kleine Stadt mit großer Geschichte)이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Karl) 5세는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는 칙령들을 선포하였고, 이같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꺼지느냐 계속 살아나느냐 하는 기로에서 개신교 세력의 조직적 연대가 슈말칼덴에서 진행되었다. 1531년 2월, 최초의 개신교 영주였던 헤센의 방백작 필립(Philipp des Großmutigen)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Johann Friedrich I.)가 주도하여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무명의 작은 마을이었던 슈말칼덴은 종교개혁의 양대 세력인 작센과 헤센이 만나기 쉬운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고, 이후 여기서 총 8회에 걸쳐 동맹 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황제가 공격할 경우 6년 동안 서로 군사적 원조를 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 동맹에 참여한 도시는 안할트(Anhalt), 막데부르크(Magdeburg), 브레멘(Bremen), 포메른(Pommern),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하노버(Hannover), 함부르크(Hamburg),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켐프텐(Kempten),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등으로 대부분 지금의 독일 전역에 걸쳐 있었다. 슈말칼덴 동맹 세력들과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들간에 장기간의 내전이 계속되었고 그 사이 독일 내에서 루터파 교회는 꾸준히 세를 늘려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 5세는 한동안 프랑스-오스만투르크 동맹군과의 전투로 인해 동맹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여력이 없었다가 1546년 평화동맹을 체결한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문제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개신교 측 제후들에게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제후들이 이를 거절하고, 이에 황제가 1546년 2월 루터의 죽음 직후 군대를 일으키게 된다(슈말칼덴 전쟁, 1546~1547). 슈말칼덴 동맹은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뮐베르크(Muhlberg)에서 대패한다. 그러나 황제와의 비밀 협상 이후 표맹에 함께 하지 않았던 작센 공이 후에 태도를 바꾸어 다시 동맹에 가담하게 되고, 프랑스의 원조에 힘입어 세력을 회복하여 마침내 1555년에는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내용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 Augsburger Religionsfriede)이 체결된다.

아우크스부르크 협정과 관련하여 루터의 친구 멜랑히톤(Melanchthon)은 이미 1530년에 '온건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조를 만들어 종교개혁 진영과 로마 가톨릭 신학의 공통점을 부각하려 했지만 루터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 이후 교황청이 1537년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만투아(Mantu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개신교 탄압의 기미를 보이게 되자, 개혁자들은 이를 앞두고 가톨릭과의 차이를 부각할 필요성과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루터의 사후에 대한 제후들의 염려로 인해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정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슈말칼덴 신조(Schmalkaldische Artikel)이다. 루터는 1537년 2월 7일 부겐하겐, 멜랑히톤과 함께 슈말칼덴 회의에 참석하여 담석증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신조를 담은 슈말칼덴 협서를 계획하였으나 결국 채택 되지 않았고, 사후에 루터의 '신앙고백서'에 포함되었다.

III. 할레(Halle)
바하의 주 무대였던 라이프치히에서 50km도 떨어지지 않은 할레는 동시대 거장인 헨델의 고향이다. 하지만 할레는 무엇보다 루터의 도시이다. 이곳은 루터가 죽기 바로 전 해에 들러간 곳이기도 하고, 죽은 뒤 장례를 위해 그의 시신이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어 가는 도중 하루 머문 곳이기도 하다.

루터는 1538년 시작된 이질에다 1441년에는 중이염까지 앓았으며, 습관성 두통과 현기증으로 괴로워했다. 1545년 루터는 육체가 쇠약해졌음을 느끼면서도 고향인 만스펠트(Mansfeld) 지역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마지막 여행에 나섰고, 할레 등을 들러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1546년 2월 18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할레 시 중심에 있는 '마르크트교회'(Marktkirche)에서 루터는 생전에 세 번 설교를 했다. 이 교회에 전시되어 있는 교회의 역사 기록은 이 사실과 함께 루터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가 1541년 고난주간 성 금요일에 첫 개신교 예배를 드린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교회에서는 루터의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볼 수 있어, 개혁자 루터의 죽는 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할 수 있다.

할레는 루터 도시이자, 또한 종교개혁의 근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경건주의'의 본 고장이다. 루터 종교개혁 300주년이 되는 1817년에는 1502년 세워진 후 루터가 30년 이상(1512-45) 강의했던 비텐베르크 대학과 1694년에 세워진 할레 대학이 합병하여 '마틴 루터 할레 비텐베르크 대학'(Martin-Luther-Universitat Halle-Wittenberg)이라는 이름으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종교개혁은 한편으로는 잊혀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제 위치에 돌려놓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제와 평신도의 간극을 좁힘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섬김(Diakonie)의 제사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1530년 이후 개신교적 글들 속에 '사회봉사' 혹은 '복지'라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디아코니 즉 사회봉사로 표현되는 경건주의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다가 17세기 전반에 30년 전쟁(1618~1648)이 터지게 되고, 유럽 전역 특히 대부분 지금의 독일 땅에 해당하는 신성로마제국은 전쟁 및 전염병 등으로 전체 인구의 최소 5분의 1 정도가 사망할 만큼 피폐하게 되었다. 이에 빈자를 구호하는 노력 등이 각처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안드레아(1586-1654), 슈페너(1635-1705), 프랑케(1663-1705), 진젠도르프(1700-1760)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19세기의 본격적인 디아코니 운동으로 계속되는데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저렴하게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 '카이저스베어트(Kaiserswerther) 디아코니'도 거의 2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대표적인 사회봉사 기관이다.

이렇듯 역사 속 경건주의는 단지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예수 복음에 초점을 맞춘 루터의 종교 개혁 정신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신앙 양심과 사랑의 심장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개혁은 계속된다.

 

손교훈 선교사
독일 뒤셀도르프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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