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

[ 땅끝에서온편지 ]

이극범 목사
2017년 07월 11일(화) 14:38

낭트칙령은 프랑스 내에서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이다.

30년 종교전쟁(16세기 후반에 8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 20만 명의 죽음과 특별히 1572년 파리에서 성 바돌로메 대학살로 파리에서만 3000명의 개신교 특히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 현장을 목격한 앙리 4세(Henri IV)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이다. 이로써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화합을 도모하였다. 낭트칙령은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를 주었으며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첫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이 칙령은 1685년 10월 그의 손자 루이 14세에 의해 퐁텐브르 칙령으로 폐지되고 개신교는 다시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개혁자 칼뱅의 영향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1509년 출생하여 1533년경 회심, 같은 해 10년 이상 친구로 지내던 파리대학 장 Nicolas Cop 연설문에 칼뱅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으로 인해 결국 그는 제네바로 망명하여 활발한 종교개혁에 그의 삶을 불사른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1535년 파리에서 개신교인들이 국회에서 친 천주교 세력에 의해 2년간 37명이 화형 당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1536년 칼뱅은(27세) '기독교강요'를 발행하여 그 당시 왕 Francois 1세에게 보냈으며 1550년부터 개신교는 교회가 조직화 되며 1559년에는 창립 총회가 시작된다.

1562년 콜리니(Coligny)가 활동하던 당시에 2150개 개신교 교회와 3백만 명 신도(인구의 46%)로 증가하는 성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1572년에는 바돌로메 사건으로 파리에서만 3천여 명의 개신교 특히 지도자들이 학살을 당하는 고난의 길은 험난 했지만 '낭트칙령'이라는 큰 선물을 받기도 했다. 

낭트칙령(1598년 4월 30일)은 본래 개신교였으나 왕위 계승을 위해 천주교로 개종한 앙리 4세에 의해 개신교도에게도 예배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그 당시 낭트칙령은 화해 칙령(edit de pacification)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시적인 화합을 위한 카드로 영구적인 종교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대도시에서는 예배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Paris, Rennes, Rouen 시내에는 개신교 예배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0년이 지난 후에야 가능했었다. 아무튼 낭트칭령은 일시적이나마 최초의 종교 관용(Tolerance)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후 개신교 교회들이 정식 활동을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는 개신교를 잔인하게 조직적으로 파괴한 왕이다. 그는 초기에 개신교를 천주교로 회유정책을 펴기 시작하여 핍박과 강압회유 군인사 차별대우 등 프랑스의 제네바로 불리는 개신교 도시 La Rochelle을 함락했으며 종래에는 퐁텐블르 칙령(1685)을 통해 낭트칙령을 폐지한 것이다. 그 이후 개신교인들이 거주하는 곳은 프랑스 영토에서 불법이 된다. 개신교인은 그 후부터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3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게 되며 상당수는 네덜란드, 영국과 프로이센을 비롯해 북 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였다. 

프랑스에 남은 개신교도들에게는 1787년 Louis 16세의 관용칙령(Edit de Tolerance)에 의해 양심의 자유를 보장 받는다. 이는 천주교인이 아닌 자에게도 시민권을 허용하되 천주교인이 되는 강제조항을 삭제한 것이며 그 후 2년 뒤 1789년 인권 선언에서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다. 이로써 100년간의 종교 핍박에 막을 내리게 되고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의 혜택을 받게 된 셈이다. 그후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는 국민 연합을 위해 국교인 천주교 외에도 기독교를 대표하는 개혁교회와 루터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이 시점부터 프랑스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프랑스의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조직 신학자와 주경 신학자로만 알려 지고 있는 것은 칼뱅의 평생 사역의 극히 부분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88명의 선교사를 프랑스로 파송하여 조국 프랑스 선교에 혼신을 다했다.

그 결과 프랑스에는 개신교회 총회가 창립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그는 멀리 스코틀랜드까지 유럽 전역에 선교사들을 보냈다. 최근에 자료에 의하면 칼뱅은 1556년 2명의 목사를 포함하여 14명의 개신교 최초의 선교단을 브라질로 파송하여 브라질에 위그노 교회를 설립하는 일과 인디언 원주민들을 선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최근 브라질은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칼뱅은 장로교회의 기초를 세운 개혁자이다.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다수임에도 프랑스 종교개혁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은 연구와 현장 방문을 기대해 본다. 연재 기간 중 많은 관심을 보여준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극범 목사
총회 파송 프랑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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