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게 개회된 개혁교회 창립총회

초라하게 개회된 개혁교회 창립총회

[ 땅끝에서온편지 ] 프랑스종교개혁-<6> 비스꽁떼 4번지

이극범 목사
2017년 06월 15일(목) 16:09
▲ 비스꽁떼 4번지를 알리는 표지판.

프랑스에서 혹독한 박해의 불길을 피해 제네바에 도피해 있었던 장 칼뱅은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 교회를 시 의회의 승인을 얻고 교회법을 만들어 교리와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처음에는 제네바 시민들의 거부 반응에 부딪혀 3년간 스트라스부그에 머물다 다시 돌아온 1541년부터 제네바를 떠나지 않고 남은 생애를 성경 강해와 제네바 법률 등 특별히 교회법의 초석을 놓는 데 혼신을 다했다. 칼뱅은 신약성경의 교회를 근거로 해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제도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의 핵심이 되었다. 이 제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장로교회 법이 된다. 비 칼뱅주의 교회에서도 대부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무렵 수많은 프랑스 젊은 사역자들이 칼뱅의 가르침을 받아 프랑스에서도 개신교가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0개가 넘는 개혁교회가 설립되었고 프랑스인의 46% 이상이 개신교 신앙을 가졌던 화려한 역사를 가지게 하였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파렐은 뉴사텔에서 제자들을 배출할 시기에 프랑스는 심한 박해가 지속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1559년 5월 25일에서 29일까지 마침내 프랑스 개혁교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총회가 열렸던 장소는 파리의 심장부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서 세느강변 쪽의 골목에 위치한 보나파르트 길(Rue Bonaparte)을 따라가다 두 번째 나오는 오른쪽 골목, 비스꽁떼 길(Rue Visconti) 4번지이다.

이 주변은 50년 전인 1508년 르페브르 교수의 연구처이자 강의장이다. 그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위그노가 그곳에서 탄생했다. 위그노란 독일어의 '동맹'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이다. 위그노에는 교수, 의사, 법률가, 고급 성직자, 중산층 그리고 일부 귀족들이 가담했다. 이들은 제네바의 칼뱅의 가르침을 받은 순수한 제자들의 열매이다. 프랑스는 장로교회라는 이름 대신 개혁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부흥은, 하층 농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루터교보다 더욱 깊고 넓게 일어나고 있었고, 제네바와 가까운 리옹 지방과 남부의 랑그독 지방, 그리고 영국 해협에 접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더욱 부흥했다.

역사적인 프랑스 개혁교회의 창립 총회가 열렸던 비스꽁떼 길은 예전에는 '마레 길'이라고도 불렸고 한때 '작은 제네바'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 길은 파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소형 자동차도 통과할 수 없는 협소하고 초라한 골목이었고 양 편의 평범한 4, 5층짜리 주택가 아파트가 있을 뿐이다. 지금도 중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여기에서 1558년 전국 72개 교회 대표들이 모여 푸아띠에(Poitiers) 예비모임에서 준비한 '신앙고백'과 '교회조직 초안'을 확정했다. 감시와 박해 속에서도 몇 개의 촛불들이 지하실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서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처럼 언제나 위기 속에서 다락방, 지하실, 감옥에서 잉태되었다. 프랑스의 개혁교회도 이렇게 초라하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숨은 인물들이 이웃 나라로 디아스포라가 되어 스위스의 시계공, 독일의 면직공, 영국의 수많은 기술자 및 학자들과 여러 명의 대통령들이 배출되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으로 오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통치하심이다.

이극범 목사
총회 파송 프랑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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