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회심은 어디서 어떻게?

칼뱅의 회심은 어디서 어떻게?

[ 땅끝에서온편지 ] 프랑스종교개혁-<5>프랑스의 중부 도시 부르즈

이극범 목사
2017년 06월 09일(금) 17:48

칼뱅이 언제 개신교인으로 회심했는지 또 그의 회심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점진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율법학자 바울이 다메섹 도상까지 이르는 것처럼 장 칼뱅도 비슷한 다메섹의 체험을 하게 된다. 한때 인문주의 학자가 되어 세네카에 심취했지만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고 결국 성경 말씀을 연구하던 중 갑작스런 진리의 빛이 그에게 비친 듯 하다. 그는 시편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런 회심으로 내 마음을 압도하셨다. 나는 즉시 새로운 길을 달려 가려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불타올랐고 다른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예전처럼 맹렬히 추구하지 않았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아마 오를레앙(Orleans)에서 공부하던 마지막 몇 달의 기간 동안 경건한 신자 드라 포르주(de la Forge)의 상가에서 살면서 '진리의 빛'이 그에게 비친 듯 하다. 그후 그는 고향 노와용과 파리를 드나들며 방랑생활 중에도 다시 드라 포르주를 만나려 잠깐 들린 적이 있기도 했다.

오를레앙은 매우 놀라운 곳이다. 그 도시는 날마다 테니스를 즐기며 끝없는 연회와 파티를 열었고 학생들은 걱정 없이 보트를 즐기는 환경이었다. 장 칼방은 그곳에서 법학을 넘어 더 많은 것을 공부했으며 루터의 사상을 지지하는 볼마르 멜키에르(Wolmar Melchior)라는 훌륭한 그리스어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인이었으며 이미 라틴어에 능통한 칼뱅은 볼마르의 강의를 통해 신약 언어를 배워 그리스어 원문을 통독하며 주경학자로서 자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후에 칼뱅은 고린도후서 주석을 헌정하며, "선생님의 지도 아래 법률 공부와 함께 그리스 문학을 공부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볼마르는 그리스 문학에 정통한 교수였다. 볼마르의 지도를 받으며 칼뱅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공부에 심취 했으며 낮에는 강의를 빼지 않고 들었으며 밤에는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는 배우고 연구하고 사색하는 개혁자였다.

그는 북부 그의 고향 누아용에서 태어나 10대 때부터 파리에서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을 배웠고,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즈 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을 수학하면서 12세의 소년 테오도르 베자(Beza Theodore)를 만나지만 그의 계승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가 회심한 곳은 올레앙과 부르즈 두 도시 중 어느 곳인지 학자들간의 약간 다는 견해도 있지만 여기에서 부르즈라고 믿는 것은 이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내린 필자의 결론이다. 부르즈는 오올레앙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대학 도시며 16세기 종교 개혁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확산시킨 중심지이다. 더욱이 올레앙에는 칼뱅의 신앙적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부르즈에는 여러 곳에 그의 전도활동 유적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르즈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했음을 증명해 주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칼뱅의 강단' 마을 한복판의 '칼뱅의 돌'과 이웃 마을 리니에르의 '칼뱅의 다리' 등이 그의 전도행적을 증언하고 있다.
칼방이 개신교인으로 회심한 시기는 대체로 1533년 전후라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이극범 목사/총회파송 프랑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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