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보름스와 슈파이어(Worms und Speyer)

<8> - 보름스와 슈파이어(Worms und Speyer)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진리로 이기리로다

전준봉 목사
2017년 05월 25일(목) 09:33
   
 

#보름스의 외침
중세 게르만 문학 서사시 니벨룽엔(Nibelungenlied)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라인강이 흐르는 보름스는 루터(Martin Luther)의 외침과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이끌어낸 역사의 장소이다. 1521년 3월 당시 신성로마제국(Heiliges Romisches Reich)을 다스리던 황제 카를5세(Karl V)는 로마교황청의 요청에 의해 교회와 교황을 비판하여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가중시킨 루터(Martin Luther)를 불러 심문을 통해 분쟁을 종식시키려 제국의회(Reichstag)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분열과 종교개혁은 더욱 타오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가 보름스에 오게 된 것은 그가 비텐베르크에서 카톨릭교회에 대한 95개 반박문을 공표한 후에 카톨릭교회와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정치권은 많은 논쟁과 분쟁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1519년 7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에크(Johannes Maier of Eck)와 루터는 격한 논쟁으로 에크는 교황으로 하여금 루터를 파문하도록 요청했으며,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Papa Leone X)는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를 발표해 루터는 파문을 당하게 된다.

루터를 지지한 작센 선제후(Friedrich III)는 루터가 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 자신을 변호하도록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설 수 있도록 주선했다. 당시 카를 5세는 황제선거 때 자신에게 투표한 작센 선제후의 체면을 존중해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했으나, 이미 파문당한 루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1414년 종교개혁의 선구자 얀 후스도 화형 당했음)

또한 루터는 주변의 만류에 따라 자신이 보름스에 가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가 신앙적 고민을 하면서 성장했던 은수자수도원(Augustinereremiten Kloster)이 있는 에어푸르트(Erfurt)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만 말하고, 행할 것이라는 결단적 설교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곳의 지붕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마귀들이 있을지라도 가겠다!'고 표현했다.

루터는 비텐부르크(Wittenberg)에서 출발(4월2일)하여 700Km의 여정 끝에 1521년 4월16일에 보름스에 도착했다. 여정 가운데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시인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를 지어 보름스를 향하는 자신의 비장함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착한 당시 보름스 인구보다 두 배가 많은 2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4월 17일에 루터는 보름스 제국 회의에 출석했으며, 그곳에 참여한 청중들은 제국의 권력자들 앞에서 선 루터의 모습은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당시 보름스에는 루터의 지지자와 카톨릭교인 사이에는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는데, 여기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재판을 받을 때 거리에서 카톨릭교인과 루터를 지지하는 사람 사이에 격렬한 토론이 있해는데, 카톨릭교인은 루터를 배반자라고 열변을 토해 내며 말하자, 반대로 루터의 지지자는 루터의 주장과 행위가 옳다고 반박하였다. 서로간의 주장이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자 결국 루터 지지자가 제안을 했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서 있는 길 한 가운데 꽂으면서 말했다. "만일 루터의 주장이 옳으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라고 확신의 말을 하면서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서 길 가운데 꽂아 둔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나무는 긴 역사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1900년 경 부터 큰 느릅나무에서 진실을 상징하는 루터나무(Lutherbaum, Lutherstrβe1)로 불려지게 되었다. 선제후 트리어 대주교의 고문관이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책의 저자가 맞는가?"와 "책의 내용을 철회할 뜻이 있는가?"였다. 루터는 자신이 쓴 책을 인정하면서, 두 번째 질문인 책의 내용을 철회할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황제와 로마교회 관련자들은 분노했지만, 구두로 직접 답변하는 조건으로 하루의 시간을 허락하게 된다.

다음 날 4월 18일 제국회의장에서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을 통해서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는 이상 교황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유익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이러한 긴 대답을 오늘날 "Hier stehe ich und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즉,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으로서 루터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루터의 답변에 관하여 독일어가 서투른 카를 5세는 옆의 추기경에게 "공의회가 틀렸다고 한 것인가?"라고 묻자, 감각적으로 루터는 힘을 주어 "예"라고 답변했다. 이에 황제는 발언을 통해 "루터는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며 얻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열변을 토했고, 청중들은 루터를 연호하는 분위기속에 결국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려는 계획은 실패하고, 약속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해주면서 3주 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이며, 도중에 설교나 연설을 하지 말며, 3주 후에는 다른 조치가 있을 것이라 하면서 루터가 보름스를 즉각 떠나길 명령했다.

루터는 4월 26일 한밤중에 보름스를 떠났고, '루터는 법 밖에 있다'는 황제의 선언과 함께 제국회의가 마치는 5월 25일에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제국시민의 자격을 박탈하는 추방령을 내리고, 그에게 숙식과 안전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루터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보름스를 떠난 후에 루터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Wartbrug)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루터는 '기사 게오르크로(Junker Jorg)'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수도복을 벗고 긴 수염과 함께 10개월 동안 성 안에서 생활하면서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해 보름스는 루터가 외침의 자리(Domplatz 1정원)에 상징적인 청동의 신발과 답변을 적은 청동판과 교회건물의 부조동판이 서 있고, 그 곳에서 100m 떨어진 곳에 그를 기념하는 공원을 리첼(Rietschel)이라는 사람에 의해 1868년 만들어서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Luther Denkmal,  Wilhelm-Leuschner-Straße)

공원의 기념비는 중앙에 루터가 서 있고, 루터를 중심으로 그 발 아래 단에 발데스(Pertus Waldes), 영국의 위클리프(John Wiclif), 체코의 후스(Jan Hus aus Boehmen,) 그리고 이태리의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Girolamo Savonarola aus Italien)등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를 이끌었던 사람과 그 주변에 루터를 돕고 지지한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 헤센 제후 필립 (Philipp der Großmutige)과 로이힐린 (Johannes Reuchlin), 그리고 루터의 친구 멜랑히톤(Philipp Melanchton)과 그와 뜻을 같이한 몇몇의 여성들 그리고 루터의 설교와 세례식, 결혼 등 종교개혁운동의 과정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고 있다. 그 외 보름스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 성당과 니벨룽엔박물관과 11세기 유대인 묘지가 있다.

#슈파이어의 저항
(die Speyer Protestation)
슈파이어는 보름스에서 남쪽으로 약50Km 떨어진 라인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칠 때 권력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당시 지배자 독일 황제 카를 5세가 제국도시 슈파이어에서 두 번의 제국의회를 열었었다. 첫 번째는 1526년 소집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와 교전 중이던 카를 5세는 투르크의 위협까지 받게 되자, 국내의 분란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 국외 추방한 보름스협약의 적용을 유보하고, 종교회의가 열릴 때까지 각 제후와 도시는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그 후 사태가 호전되자 카를 5세는 1529년 4월 두 번째 의회를 소집하여 앞서의 선언을 철회하고, 보름스협약의 엄수를 명령하였다. 이때 다수의 가톨릭신도는 카를 5세의 조치를 찬성한 데 대하여 소수의 개신교신도(6명 제후, 14개 도시)는 종교문제를 다수결로 정하는 부당성을 비난하는 항의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용어가 프로테스탄트이다. 그리하여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는 유래가 여기서 생겼으며, 복음적 신앙의 탄생 도시가 되었으며, 그 후 개신교는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슈말칼덴동맹(Schmalkaldischer Bund 1531년2월)을 결성하게 된다.

1)기념교회 (Gedachtniskirche)
기념교회(Gedachtniskirche,1893-1904, Bartholomaus-Weltz-Platz5)는 1529년 제국의회에서 결정된 부당함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에 대한 외침과 그 장소을 기억하면서 세운 건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고딕양식의 첨탐이 100m 높이로 저항의 의지를 표현하며, 교회 현관 입구에는 역시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진실를 강조하는 성경을 들고 서 저항을 상징하는 루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주변에서는 역시 루터를 도왔던 제후들이 벽면에 붙어 있으며, 교회 내부에는 여러 개의 의미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제단을 향하는 중앙통로는 붉은 카페트와 제단 중앙에 기념교회의 그림이 있는데, 그 교회 벽면에 큰 문이 그리고 예수님이 문 앞에 서 계시는데 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 외 슈파이어에는 제국의회가가 열렸던 교회(Domplatz, 길이134m, 동 첨탑71m, 서 첨탑66m)와 교회로부터 150m 거리에 세워진 순례자 야곱의 동상(이곳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의 지팡이를 교환한다)과 12세기 유대인 회당(Synagoge, Am Weidenberg 3)의 흔적을 간직한 박물관이 있다.

1521년에 보름스에서 루터 자신의 확고한 신앙에 대한 생생한 외침과 그 외침의 영향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저항을 슈파이어에서 공동체적인 움직였다는 것을 통해 오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교회와 각자가 역시 새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과 그 노력을 위한 저항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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