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종교개혁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첫 여성

500년 종교개혁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첫 여성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7> -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

석인덕 목사
2017년 05월 10일(수) 11:24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500년 종교개혁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첫 여성이다. 파문 당한 사제와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의 결혼, 세기적 스캔들의 주인공인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루터와 결혼해 21년 살았던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루터하우스(M. Luther Haus Collegienstraße 54, 06886 Wittenberg)에서다. 루터하우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한 여인의 동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이다. 왜 그녀의 동상이 루터의 집 첫 입구에 있을까? 날카로운 얼굴 곡선과 매서운 눈매, 문을 열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포즈 - 한눈에 보기에도 강한 인상의 여인 같아 보인다. 카타리나 폰 보라 -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1. 출생과 수도원 생활
카타리나 폰 보라는 1499년 1월29일 라이프찌히 남쪽에 위치한 리펜도르프(Liffendorf)에서 몰락한 귀족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6살이 되던 1505년 어머니가 죽고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공교롭게도 이 해에 훗날 남편이 된 루터 역시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에어푸르트(Erfurt)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집안 사정에 의해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1509년 10살의 나이에 님쉔(Nimbschen)에 있는 마리엔트론 수녀원으로 옮겨 16살에 정식 수녀가 된다. 당시 수녀원은 서원을 통한 여성의 신앙 정진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가난해 생계를 이을 수 없거나 가족에게 버림 받은 여성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자의와 상관없이 보내져 인내와 복종, 절제와 금욕의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그곳의 삶은 어린 소녀에게, 또 성장해 여인이 되어가던 한 여성에게는 힘든 삶의 장소였다.

그러던 중 친구가 전해 준 글(루터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을 읽고 놀란다. '성직자가 독신을 통해 육체의 거룩한 제의를 걸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며, 기도와 금식을 통해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영혼에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경건과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을 읽고 난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루터에게 편지를 쓴다. "존경하는 루터 선생님, 저희는 수녀원의 수녀들입니다. 저희는 평생 이곳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믿음의 근본은 성경이며, 신부나 수녀도 결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이곳을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엄한 규율을 강요하는 수녀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제발 저희의 탈출을 도와주세요".

2. 탈출, 루터와의 만남 그리고 결혼
1523년 4월6일 부활절 밤 12명의 수녀들은 토어가우(Torgau) 출신 상인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의 도움으로 비린내 나는 청어통의 바닥에 숨어 님쉔의 수녀원을 탈출하여 비텐베르그로 온다. 이들 중 3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9은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그에 남는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하지만 홀로 남은 카타리나는 화가였던 크라나흐(L. Cranach)의 집에 살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몇 남자가 있었지만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독신이었던 루터를 마음에 둔 듯하다. 짝없이 홀로 남은 그녀를 보고 루터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루터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는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그는 카타리나와 '결혼'에 망설였다. 왜냐하면 사제가 되며 결심한 독신의 서원을 지키길 원했고, 사제의 결혼으로 인한 사회적 비판과 로마교회와 싸움에서 지지자를 잃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동료들은 걱정하며 반대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말 그대로 '세기의 스캔들'이었다. 독신을 서원한 사제와 평생 주님의 신부로 서약한 수녀의 결혼 발표는 조소와 저주의 대상이기도 했다.

"수도승과 그의 연인이 한 자리에서 나뒹구니, 적그리스도가 태어나리, 웃을 일은 아니리". 항간에 이런 노래가 불려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파문 당한 다음해 루터는 '결혼에 관하여'란 글을 발표한다. '성직자도 결혼할 수 있으며 성직자는 당연히 독신이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규정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는 글이었다. 당시로선 그야말로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1521년 6월27일 신랑 루터의 나이 42살, 신부 카타리나의 나이 26살- 16년 차이의 둘은 결혼을 한다.

3. 신앙의 동반자로서의 가정생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 같다. 루터의 후견인이었던 작센 영주 프리드리히(Friedrich des Weisen)의 도움으로 비텐베르크대학 내의 수도원 한구석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내조자'이면서 '신앙의 동지'이고 또한 현숙한 아내였고 강한 생활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6명의 자녀를 낳아 키우며 여러 명의 조카, 심지어 남편 친구의 자녀까지 돌봤다.

루터의 집에는 신앙 상담과 토론을 위해 찾아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손님접대와 모든 일을 묵묵히 감당했다. 또 집안을 깨끗이 가꾸고 루터의 건강을 위해 포도주와 맥주를 집에서 빚곤 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루터하우스 지하실에 가면 그 당시 사용했던 주방도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주방의 도구와 맥주를 보관했던 통들이 눈길을 끈다. 또 그녀는 가계의 제정적 충당을 위해 수도원 한편의 정원과 밭을 가꾸고 돼지도 키웠으며 근처 엘베(Elbe) 강가의 양어장도 운영하는 등 강한 생활력을 보인다.

이런 카타리나를 루터는 무척이나 사랑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날 위해서 하신 일이 더 많은데 사실 나는 그리스도보다 내 아내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루터는 '나의 주인 케테(Kathe-카타리나의 애칭)', '비텐베르그의 샛별'이라 아내를 부르며 자신은 '자발적 종'이라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또 카타리나는 루터를 '박사' '설교자' 또는 '사랑하는 주인'이라고 칭했다. 루터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여겼는지는 다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거룩한 결혼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 가는 귀한 보물이다.

경건하고 쾌활하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아내야말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카타리라는 루터가 시련을 당하거나 역경에 부딪혀 고민할 때 동반자요 상담자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다소 딱딱한 신학적 논쟁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1529년의 '마부르그 종교회의'(Marburger Religionsgesprach)에서 루터가 성찬에 관하여 토론할 것을 고민할 때 그에게 성경을 읽으라 권하였다. 이런 그녀에 대해 루터는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구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4. 사고와 죽음 그리고 그녀가 남긴 자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실지 기다려 봅시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고 루터는 1546년 2월 63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때까지 아내 카타리나는 자녀들과 비텐베르그에 살고 있었다. 얼마 후 그곳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대학은 이주를 결정하고 그 길을 따라 나섰던 그녀는 토어가우로 가던 중 마차사고를 당해 심한 부상을 입어 결국은 숨을 거둔다. 토어가우에 있는 그녀의 무덤 비문엔 이렇게 써 있다. '1552년 12월 20일, 마틴 루터 박사의 부인 카타리나 신의 축복 속에 이곳 토어가우에 잠들다'.

500년 종교개혁의 첫 개신교 목사의 사모가 되었던 카타리나 폰 보라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수녀원을 탈출해 결혼한 수녀로, 여섯 자녀의 어머니로, 개혁가 남편의 내조자요 신앙의 동지로 살았던 그녀의 삶은 신앙생활의 힘의 원천이 가정이 있음을 일깨워 준 귀한 삶의 본 그 자체였다.

혹자는 개신교 가정의 가장 행복한 가정 모습을 독일 화가 슈팡엔베르그(G. A. Spangenberg)의 그림으로 '루터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꼽는다. 개인이 신앙 속에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면 가정은 세상에 성화(聖化)를 이룰 장(場)이다. 500년전의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영성이 단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가정 속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우리에게 삶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석인덕 목사
구라파한인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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