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 기획> '당당한 그리스도인' 동신교회 김철모 장로

<한국기독공보 기획> '당당한 그리스도인' 동신교회 김철모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7년 04월 24일(월) 13:1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98회기 부총회장을 지낸 김철모 장로(함해노회 동신교회)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은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영적 자존감이 높은 그는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통해 세속의 미혹을 이기고 믿음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자부한다.

그는 독립운동가인 외할아버지의 기개를 물려받고 40년 넘게 부흥사로 활동한 어머니의 기독교신앙을 이어받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말보다는 행동하는 편에 서왔다. 그런 소신때문에 누명이나 시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위기마다 하나님께서는 높여주셨다"는 것이 김철모 장로의 간증이다.

김 장로의 생애를 관통하는 철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되는 권세를 받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도력은 박력있게, 위기에는 침착하게, 통솔에는 공평하게, 반대에는 인내있게 행동하며 특히 음모를 경계해왔다.

▲ 김철모 장로와 부인 안정순 장로, 슬하 2남 1녀.

김철모 장로는 1947년 평양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외할아버지가 일찌기 복음을 접하고 신앙을 가계에 뿌리내렸다. 2년 전 93세로 별세한 어머니 김선옥 권사는 40년 넘게 전국을 돌며 부흥사로 활동했을만큼 구령의 열정이 뜨거웠다.

김 장로 가족은 1ㆍ4후퇴 당시 남쪽으로 피난내려와 서울을 거쳐 부산 영도 피난촌에 정착했다. 외가가 부자였지만 남한으로 넘어오며 안내자에게 돈을 뺏기고, 금방 돌아갈거라는 생각에 여러가지를 미처 챙겨오지 못해 실향민들이 그랬듯 부산에서는 자갈치시장에서 피난민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김 장로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때마다 기적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고 반석의 샘이 터졌다"며 "학비가 없을 때 생각지도 못한 분들에게서 후원이 이뤄졌고, 쌀이 떨어지면 다음날 누가 집앞에 쌀을 놓고 가곤 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기도원에 가면 수십일 씩 집에 안들어온적도 있다. 그러나 김 장로와 누나는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원망하기 보다는 '기도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신앙적 철이 일찍 들었다.

▲ 김철모 장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98회기 부총회장으로 섬겼다. 그는 총회현안을 풀어가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남다른 구령의 열정을 가진 어머니는 일찌기 김 장로에 대한 서원기도를 한 적이 있다. 김 장로의 나이 5살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며 기차를 타기에 앞서 죽을듯이 아프자, 주변에서 애를 버리고 가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죽더라도 데리고 간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하나님께 "병을 고쳐주세요.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다고 한다.

전국을 돌며 부흥사로 활동하던 어머니는 삼각산, 옥천, 경주 등지에서 기도원을 설립할 정도로 복음전파에 열심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통해 성령 체험도 하고, 자라면서는 당연히 목회자가 되는 것으로 알았던 김 장로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품을 무렵 강한 육체와 정신력을 겸비하고자 해병대 장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입대 당일 문밖에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엄격했다.

제대 후 바로 취업이 되면서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뒤로 미루었다. 김 장로는 "바쁘게 살다보니 솔직히 신학교 입학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다. 하나님께 40살 이후에 하나님나라 일꾼으로 충성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 3년만에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부산지역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 이후 본사 영업부장으로 파격승진 발령이 났지만 또다른 사회경험을 쌓고자 과감히 다른 회사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이직한 회사에서도 부산에서 일을 맡았고 나름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우리 지점에서 매출이 나오지 않으면 본사가 운영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본사가 실적 저조로 정리단계에 들어서며 부산지점을 독립해 운영해보라는 사장의 제안을 받고 기도끝에 인수했다. 김 장로가 현재 대표이사로 있는 (주)세닉스산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사업체는 화학제품 기초자재를 판매하는데 주업은 방위산업과 관련돼 있다. 그는 사업을 하며 제일원칙으로 돈을 좇지 않았다.

김 장로는 "나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물질보다 신앙 유산을 받은 것을 자부하는 사람이다. 사업과정에서 그 정신에 따라 돈을 좇지 않았다"며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니 업계에서 최고가 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일했다"고 간증했다.

▲ 부총회장 시절 교단을 대표해 필리핀 선교지와 수해지역을 방문한 김철모 장로는 이후 개인적으로 현지 선교를 계속하고 있다.

사업을 하며 40살이 훌쩍 넘었고 서원기도의 실천은 계속 미뤄졌다. 그러다 김 장로는 어머니의 기도와 권면이 계속되자 정신이 번쩍 들며 목회자로 서지는 못하지만 평신도 지도자로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인 교계 연합활동에 나섰다.

그는 함해노회장,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이사, 남선교회전국연합회 부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낸 뒤 교회와 노회, 총회 등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 총회 부총회장 후보에 단독 추천을 받아 당선됐다.

부총회장 후보로 나서며 당시 "저의 삶이 모두 노출되고, 비판받고, 발가벗겨져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빌립보서 4장 9절을 묵상하며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순종하며 충성스럽게 행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세상 선거 방법(조직,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부총회장에 선출되자 그 약속을 오롯이 지켜나갔다. 김 장로는 "부족한 사람을 믿어준 분들을 생각하면 자리나 차지하는 허수아비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총회현안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개진하려 노력했고, 내가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밝혔다.

김 장로는 총회에서 '교회 동반 성장'에 큰 족적을 남겼다. 교회자립위원회의 위원장과 교육정책위원장, 다시 교회동반성장위원장을 맡으며 자립대상교회의 통합적 목회지원 정책을 만들어 가시적인 효과를 거뒀다.

또한 교단을 대표해 필리핀 UCCP총회에 참석하고 타클로반 수해현장의 긴급구호 활동을 점검한 후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현지 빈민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 시무장로 은퇴를 하면 해외선교에 더욱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공명선거 정착에 힘을 보태고 있다. 김 장로는 클린선거를 위해 총회임원회에 청원한 '자율지킴이' 도입이 허락받아 가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독교 이미지가 대사회적으로 훼손된 배경에는 교단장 선거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노회에서 공명선거에 관심있는 분들을 추천받아 깨끗한 선거문화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 것입니다."

한편 김철모 장로의 가족관계는 부인 안정순 장로와 2남 1녀가 있다. 부인 안정순 장로는 예술감각이 뛰어나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신학을 전공한 이력에 함해노회 부산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섬김과 나눔의 실천에 앞장서왔고, 신앙심이 남달라 최근 환갑 기념으로 집안잔치 대신 인도에 교회 2곳을 건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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