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 말 잘 듣게 하는 비결

자녀들, 말 잘 듣게 하는 비결

[ 기독교교육이야기 ] 유하워드 목사의 사교육과 신앙의 균형 사이(완)

유하워드 목사
2017년 03월 02일(목) 14:06

나의 작은 이모님은 세 자녀를 모두 서울대에 입학시켰다. 이런 얘기를 하면 옛날에는 서울대 입학이 쉬웠다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는데 막내가 아직 20대다. 그러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는 아니다. 하여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슨 힘으로 아이 셋 입시를 치를 수 있었냐는 것이다.

키는 아담하시다. 목소리도 모기 같으시다. 고함치거나 매를 드는 일도 없으시다. 이모님에게는 눈에 띄는 카리스마적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런데 남 다른 부분이 있으시다.

이모님은 자녀들의 입시 기간 중에도 결손 가정의 학생 돌보는 일을 계속하셨다. 아이들의 고3시간 중에 죽음에 임박한 시부모님을 댁으로 모셔 들이셨다. 두려워 하시는 시부모께 신앙을 전하시려고.

이러한 부모의 행동이 자녀들의 마음에 심어 놓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존경심이다. 그리고 그 존경심은 자녀들을 순종하게 이끌었다. 이는 세 자녀가 모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고백하는 바이다.

높은 위치에서 낮은 곳까지 내려온 만큼 낙차의 힘이 생긴다. 부모가 아래로 내려온 만큼 참으로 강한 힘이 생긴다. 부모의 권위는 자아실현(自我實現)이 아니라 자기부인(自己否認)으로 얻어진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1).

학원에 있노라면 각 학교에서 미움 받는 선생님들의 신상정보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선생님 흉보기를 밥 먹듯 하는 학생들이 요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뭄에 콩 나듯 학생들이 존경하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교실 청결에 대해 고급과학 지식을 동원해서 설득하려는 선생님은 재수 없다. 생활기록부에 남는 벌점이라며 압박 하는 선생님은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복도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아무도 모르게 줍는 교장 선생님은 존경한다. 왜 그럴까?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내려놓고 섬김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강한 힘을 포기하고 참으로 강한 힘을 붙들었기에 존경한다.

이런 교장선생님이 무더운 여름에 냉방기 끄고 수업하자고 해서 땀을 비 같이 흘렸으면서도 학원에 와서 불평하지 않는다. 누가 그 교장선생님을 흉보면 아이들 스스로가 나서서 교장선생님 편에 선다. 자원 없는 나라에서 전기 아끼자는 교장선생님 말씀이 뭐가 틀리냐며. 웃긴다. 그런데 이것이 존경심의 힘이다.

회초리는 초3까지, 협박은 초6까지가 유효기간인 듯하다. 그러니 일찍이 존경심의 약발을 붙드는 게 살길이라. 그리스도를 닮아감이 살길이라, 난 그렇게 생각한다.
23년간 교육현장에서 목격해 왔다. 잘 풀리는 아이들의 공통점 하나는 통(通)이다. 통(痛)을 통(通)으로 극복하는 아이다.

윗사람들과, 동료와, 그리고 갈등하는 사람들과도 대화로 풀 수 있는 아이들이다. 자신 스스로와도 소통할 줄 알기에 스트레스로부터 빨리 탈출한다. 그런 아이들의 대부분은 통(通)의 기본을 부모로부터 배운다.

"너 그렇게 해서 인서울 대학은 갈 수 있겠어?" 보다는 "요즘 많이 힘들지? 아빠가 더 잘할게…"가 아이를 살린다. 입시전문가와 상담 받을 여력으로 아이와 한 번 더 소통하려는 어설픈 몸부림이 자녀를 일으킨다.

내 아이가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보다 하나님과 통하고 부모와 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하통부통(하나님과 통하고 부모와 통하기)'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덤으로 따라오는 게 영적 원리니까.

※ 이번호를 끝으로 '사교육과 신앙의 균형사이'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유하워드 목사님과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부터는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장신대 양금희 교수가 집필하는 '루터, 개신교교육의 아버지'란 칼럼을 통해 교회 안 교육 뿐 아니라 공교육의 토대를 놓은 루터에 대해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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