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영혼의 처절한 고뇌의 몸부림

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영혼의 처절한 고뇌의 몸부림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5> - 종교개혁의 중심 비텐베르크

김성권 선교사 ches@pckworld.com
2017년 02월 21일(화) 15:54
   
 

루터의 첫 방문
루터가 비텐베르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젊은 루터 영혼의 처절한 고뇌의 몸부림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청소년시절과 대학시절에 상당히 성실하게 지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청년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발버둥을 치는 모습은 루터를 향한 주님의 특별하게 빚으시는 손길이 아닐까?

주님은 앞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게 되는 그릇으로서 루터의 영혼을 준비시키셔야만 하셨을 것이다. 루터의 고행을 위한 수련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남다른 열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루터의 양심은 오히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에 짓눌려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견뎌야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할까?" 루터는 도무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루터의 고해신부이며 친구였던 슈타우피츠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하는 루터로 인해 큰 곤경을 느낄 지경이었다. 영적으로 절망의 문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루터에게 슈타우피츠는 비텐베르크로 가서 가르치는 일을 해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렇게 1508년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신칭의와 십자가 신학의 산실
그 후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Schlosskirche)의 문에 '95개 논제'를 붙일 때까지 '이신칭의'의 놀라운 깨달음에 기초하는 종교개혁의 자양분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다. 특별히 1513년부터 1518년까지 전념하였던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한 강해는 종교개혁의 생수를 공급하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작센의 선제후인 현자 프레데릭이 1502년에 세웠다. 주님의 섭리였을까? 그랬기에 거기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근간이 되는 신앙적인 이론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루터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씨앗을 배양하며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체 천지개벽과 같은 엄청난 개혁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이신칭의의 열린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수도원 시절에 배양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자비가 루터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한 은혜로 밀려왔던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위엄과 이름과 명예를 인간의 벌거벗은 몸으로 맞닥뜨리는 영혼의 깊은 절망을 맞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혼의 험난한 순례길을 지나온 터였기에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리지 않으면 신학자가 될 수 없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 기반을 두는 영광의 신학에 대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헛된 노력"이라고 말하는 십자가 신학은 루터의 영적 고행의 자연스러운 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영혼에게 면죄부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주님의 사랑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역겨운 것이었다. 루터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개선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자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95개 논제를 내걸게 된다. 그렇게 종교개혁의 불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비텐베르크 탐방 코스
비텐베르크에 들어서면 여느 유럽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넓은 광장이 방문객을 맞이해 준다. 광장의 중앙에는 시청을 뒤로하며 두 개의 동상이 서 있다. 하나는 루터의 동상이며 또 하나는 그의 평생지기인 멜랑히톤의 동상이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95개 논제가 발표된 다음해인 1518년 약관 21세의 나이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부임하여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비텐베르크에는 종교개혁의 두 인물을 기념하는 '루터의 하우스'와 '멜랑히톤의 하우스'를 박물관처럼 방문할 수 있다.

루터 하우스는 루터가 35년을 살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수도원이었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루터가 머무는 거처로서 사용되었다. 마당 가운데에는 루터의 아내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이 있다.

시청 앞 두 동상이 서 있는 넓은 광장의 동편에는 루터가 종교개혁 기간 동안 설교하였던 성 마리아 시교회 (Stadtkirche Sankt Marien)가 있다. 루터의 상담가요 동역자였던 부겐하겐이 비텐베르크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서 이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교회 내의 제단 뒤에는 동료 화가인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흥미롭게도 거기에 루터도 그려져 있다.

그 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이 있는데, 뒤편의 '모세의 구리뱀' 그림과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의 그림과 함께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 당시 궁정화가인 크라나흐 부자는 루터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림으로 남겨놓아 종교개혁을 표현하는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비텐베르크에서 크라나흐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종교개혁 탐방의 중요한 코스가 될 것이다.

95개 논제가 붙여졌던 성교회는 원래 작센주의 영주들이 살던 비텐베르크 성의 부속성당이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10월 31일 교회 문에 붙인 것은 11월 1일이 모든 성인을 기념하고 그들에게 기도하는 만성절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날과 장소를 택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 당시의 문은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95개 논제가 라틴어로 적혀 있는 지금의 동판은 18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기증한 것이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면 제단 앞쪽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비석이 놓여져있다.

루터는 1546년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의 법적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 그가 태어났던 아이슬레벤을 방문하였다가 성 안드레 교회 (St. Andreas Kirche)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 후 사흘 만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2월 18일). 사망한 지 이틀 후 그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어 성교회에 안치되었다.

루터가 공부하고 강의하였던 '로이코레아' 대학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탐방 코스이다. 루터는 1508년 겨울에 추천을 받아 로이코레아 대학에서 도덕철학 강의를 하면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1509년 가을부터는 성서학에서 중요한 베드루스 롬바르두스의 신학사상을 강의하였다. 그 후 1512년 10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해부터 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된다. 대학에서 루터와 멜랑히톤의 명강의는 인기가 높았고 많은 학생들이 몰려 왔다. 성 교회 문에 95개조를 게시한 이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은 개혁의 중심지로서 유럽에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루터 하우스에서 나와 성교회의 반대편으로 비텐베르크시 끝자락쯤에 가면 큰 참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교황 레오 10세가 보낸 루터를 파문하는 칙서와 교회법 책을 루터가 1520년 12월 10일에 불태웠던 장소이다. 비텐베르크는 반경 1km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종교개혁의 심장 역할을 하였다. 중요한 것은 크기나 양이 아니라 중심이요 질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관건이었다.

김성권 선교사
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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