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 기획> '외강내유' 김영창 장로

<한국기독공보 기획> '외강내유' 김영창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7년 02월 17일(금) 13:44

강원도 춘천시에서 육가공업체를 운영하는 김영창 장로(강원노회 새중앙교회)는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데다 목소리까지 우렁차 누가봐도 '상남자 포스'를 풍긴다.

그러나 기막힌 반전이 있다. 강인한 인상 이면에는 누구보다 여리고 순수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

김 장로는 춘천에서 돼지고기 가공업체 '이레식품'을 운영하면서 한우 230마리를 키우고 있다. 전형적인 '의리파'라 어려운 사람 그냥 못지나쳐 아낌없이 막 퍼주고 수익의 상당부분을 북한선교 및 해외선교와 의료선교 등에 사용하고 있다.

▲ 김영창 장로와 부인 석영실 권사. 김 장로는 아내의 끈질긴 전도와 기도 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는 전남 장성의 농가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전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젊은시절의 그는 주먹을 꽤나 잘썼다. 시비가 붙으면 자신의 주먹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술이 좋아 친구와 앉은 자리에서 막걸리 20리터짜리는 먹어야 술자리를 파하곤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인생 최고의 은총인 '부르심'을 받은 후 철저히 회개하며 부정적인 가치체계를 버리고 철저히 낮아졌다. 결혼 후 부인 석영실 권사의 끈질긴 전도 끝에 강력한 성령체험을 했다.

김 장로는 "하나님 모르던 시절의 행동을 말하는게 사실 부끄럽다. 다만 나같이 보잘것 없고 죄 많은 인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김 장로의 부인 석영실 권사도 원래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시누이를 통해 전도를 받았다. 김 장로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아도 어려운 사람 돕는다는 소리에 각종 절기에는 쌀이며 헌금을 했다.

교회는 부인과 여동생이 설득하면 가뭄에 콩나듯 마지못해 갔다. 김 장로는 "아내 등쌀에 못이겨 교회를 가준거다라는 표현이 맞다"고 말할 정도다.

석영실 권사는 "남편 교회 한번 데려가려면 온갖 비위를 다 맞춰줬다. 그래도 남편 구원받게 하려고 오랜 기간 기도하고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 2007년 장로 장립을 받으며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 장로는 인생 최고의 은총인 '부르심'을 받은 후 철저히 회개하며 부정적인 가치체계를 버리고 철저히 낮아졌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종의 '술병'인 위산과다로 고생을 하던 차에 장성에서의 농사일을 접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 근로자로 떠났다.

당시 김 장로는 홀어머니와 본가 및 처가 식구 등 13명과 함께 살던 집의 가장이었다. 건축현장 목수 일로는 식구들의 한달 120kg 쌀 소비를 견뎌낼 수 없어 사우디아라비아 근로자로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 공항에 내리자 마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것이 김 장로의 회상이다. 섭씨 40도가 넘어 숨소자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뜨거움이 엄습했어요. 해외에 처음 나간거라 비행기가 오랜 시간 비행해서 열을 받아 이렇게 뜨거운건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김 장로는 신앙도 없는데 하도힘들어 신앙인 흉내는 냈다고 기억했다. 가족들의 편지를 읽으면 눈물이 터져 사막 한가운데서 찬송 '부름받아 나선 이몸', '이몸의 소망'을 아는대로 부르곤 했다.

1년 반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한 기도원에 억지로 끌려가며(?)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위가 너무 않좋은 상황에서 안찰기도를 받다 몸이 뜨거워져 데굴데굴 구르고 회개가 절로 터지는 일이 벌어졌다. 회개하니 아프던 위가 호전되는 기적이 생겼다.

이때 '광야 훈련'이 시작됐다. 여전히 생계가 어려워 사우디아라비아를 또 1년간 갔다오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또 8개월을 다녀왔다. 외로움과 고된 노무는 신앙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 김영창 장로는 춘천에서 돼지고기 가공업체 '이레식품'을 운영하면서 한우 230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는 수익의 상당부분을 북한선교 및 해외선교와 의료선교 등에 사용하고 있다.

이후 경기도 광명으로 이천해 과일가게를 차렸다. 주일을 철저히 지켜 장사 초반에는 재고가 많이 남았지만 양질의 과일이라는 입소문이 나며 재고가 없어지는 감사 간증이 생겼다.

하지만 과일가게로는 대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어 장사를 접은 뒤 지인을 통해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했지만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신앙생활의 고비가 찾아왔다.

김 장로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니 밤마다 분통이 터져서 잠이 안왔다. 사기꾼을 잡아서 사고칠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부인 석영실 권사는 눈물로 기도의 나날을 보냈다. 남편에게 "이런 일들을 이겨내야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신앙으로 모든 화를 누르고 춘천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곳에서 부도 직전의 육가공업체를 어렵게 인수하고 폐업절차를 밟아 새롭게 사업자등록을 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이레식품'은 1997년 그렇게 시작됐다. 군부대 납품을 하는데 까다로운 절차를 모두 통과하고 20년 가까이 '클레임'이 걸린 적이 한번도 없다.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 덕분이다.

김 장로는 불의를 보면 그냥 못지나가고 '이게 맞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전진하는 뚝심의 사나이다. 그렇지만 '맞다'고 결론내리기까지 기도하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저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킵니다. 설령 손해라고 생각해도 옳은 길이라면 갑니다. 뭐든지 한 번 결정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데, 그렇다고 쉽게 결정은 하지 않습니다."

한편 김영창 장로는 교계경력으로 최근 남선교회전국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평신도 연합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북한선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인도주의적 선교차원에서 평양을 10번이나 다녀왔다.

가족관계는 부인 석영실 권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