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수다를 허하라!

교회여, 수다를 허하라!

[ 논단 ]

오현선 교수
2017년 01월 31일(화) 16:17

오현선 교수
호남신학대학교

광주에 살면서 6~7년 전부터 청소년다문화캠프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숲수다'라는 제목을 붙여 다름, 다양성, 평등을 경험하는 청소년인권평화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하는 공간, '숲'은 인종, 젠더(gender),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초대하고 있다. 숲은 수다의 공간이 된다.

사실 우리사회에서 '수다'는 여성들과 관련된 말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 행간을 채우는 정서적 특성이 '비하감'과 '비효율성'이라는 데에 있다.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을 봐도 '쓸 때 없이 말수가 많음'으로 설명되고 있고, '여자들은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 등의 예문이 제시돼 있다. 사람들은 '수다'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사람'이 '쓸 데 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쓸 데 없는 말을 하는 대상'으로 '여성'을 동일시하면서 무의식적, 무비판적으로 여성의 언어, 대화, 표현 행위를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비하하도록 조작된다. 비효율을 무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와 여성을 비하하는 가부장적 가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가 '수다'가 아닐까?

하지만 '수다'는 특정한 조건에서 드러나는 언어행동이다. 수다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공간이 심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라고 느껴질 때 행해진다. 자신이 표현하는 말에 대해 정죄, 비교, 판단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가 있어야 수다가 가능해 진다. 수다는 존중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존중받는 대화공간의 경험이 한 개인에게 수다로부터 연설까지를 가능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다'는 진정한 대화와 존중의 시작이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공간이 된다.

태어나 성장하면서, 또 성장하고 나서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욕구, 혼란스런 생각,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쓸 데 없다고 규정당하고 무시당하고 통제 당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자신의 의견을 만드는 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일, 자신과 상대를 존중하면서 대화하는 방식을 잃게 되었다. 눈치보고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만큼 남을 차별하고 비난하는 일이 더 쉬워졌다. 최근 목회자를 포함하여 기독교회와 성도들이 반지성적으로 고집스러워지고, 재정적으로 타락하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여성만이 아니라 아동, 장애인, 노인, 이주민, 미등록인, 유색인 등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며, 그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2017년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년을 기억하며 다시 개혁을 강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성장과 효율을 추구하는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 정신과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가부장적 가치를 결합하여 수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는 한국교회가 뿌리로부터 개혁되길 바란다. 효율을 우선시해 수다를 허하지 않은 채로, 겉치레만 그럴싸한 거대담론에 주목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차별적 가치를 내면화한 채로 역사적 성찰 없는 공허한 개혁이 되지 않길 바란다.

한국교회는 개혁의 당위성을 선포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은 교회에서 안전함을 느끼십니까? 당신은 교회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기를, 개혁하기를 원하십니까?'를 성도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듣고 존중해야 한다. 주님은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4,45)"라고 하셨다.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진 성도들이 기록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교회의 공간을, 문화를, 정책을 개혁하라! 교회여, 수다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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