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영성 성장에 필수 자양분 공급한 어머니의 도시

지성과 영성 성장에 필수 자양분 공급한 어머니의 도시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4> 루터가 사랑한 도시 '아이제나흐'

공현종 선교사
2017년 01월 24일(화) 15:34
   
 

아이제나흐
만스펠트에서 유년기를 보낸 루터는 1947년 그가 만 열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 한스 루터의 바람대로 만스펠트의 저명인사의 아들이자 일생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던 한스 라이네케와 더불어 대학준비교육을 받으러 막데부르그로 떠난다. 그곳에서 루터는 광산을 경영하던 집안 출신으로 막데부르그 대주교의 관리였던 파울 모스하우어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동생활 형제단(Bruder vom gemeinsamen Leben)'이 세운 학교에 다녔지만, 그 이듬해 다시 한스 라이네케와 함께 외가 친척들이 모여 살았던 아이제나흐로 학교를 옮긴다.

훗날 루터가 '내가 사랑하는 도시(Meine liebe Stadt)'라고 소회한, 해발 1000미터에 위치한 광활한 튀링엔 숲을 북부로 끼고 있고, 1067년부터 건축이 시작된 바르트부르크 성의 엄위를 받으며 12세기 튀링엔의 영주들이 건설한 이래 줄곧 베틴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이제나흐는 그 당시 14세기 베틴 가문의 전쟁(Wettinischen Hauskriegen)에서 패배한 쪽에 잘못 섰다가 이전 까지 그 도시가 속한 작센 지방에서 누리던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쇠락해가는 도시였다.

하지만 영광스런 과거를 뒤로한 채 점차 쇠퇴하고 있었지만 광석채집장과 상점들로 가득찬 만스펠트와 달리 '진정한 영적인 도시'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들, 그리고 교회기관들이 소장하던 도서들을 자랑하던 아이제나흐의 분위기는 어린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스 루터가 큰 기대를 품고 있던 영민한 그의 아들을 당시 규모나 유명세에 있어서 막데부르그의 학교에 못미치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학교로 보낸 이유는, 그곳의 명망높은 가문출신이었던 루터의 어머니 마가렛 루터의 고향이었고 여전히 외가의 친지들이 의사와 학자 그리고 행정관료와 법률가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제나흐에 도착한 루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친척이자 당시 그 도시의 존경받는 시장으로 있던 어머니의 친척인 하인리히 샬베의 딸인 우줄라 코타의 집에 기숙하게 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줄라 코타는 소년 내터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감동을 받아 그를 자기 집에 받아들였다고 하며, 훗날 루터가 '소년시절에 받은 코타 부인의 사랑보다 이 땅에서 더 소중한 것이 없었다' 고 술회할 정도로 그녀의 모성애적인 돌봄 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당시 코타 가족은 집에서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경건생활을 영위했었는데, 이러한 경건한 분위기는 소년 루터의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훗날 신부가 된 루터가 1507년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할 때 코타 가족을 초대했다.
라틴어학교인 성 게오르그에서 보낸 루터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고 다만 루터 자신의 회상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그곳에서 그가 처음 읽은 책은 15세기 이탈리아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밥티스타 만투아누스의 시였으며, 그를 지도한 선생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비간트 굴덴애프와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나중에 루터는 설교초안들을 그에게 보내기도 했다.

성 게오르그의 루터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당시 아이제나흐 대성당의 부제였던 요하네스 브라운으로,  루터가 훗날 다니게 될 에어푸르트 대학을 나온 브라운은 루터를 비롯해 성 게오르그에 다니던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책들을 읽어주곤 했는데 나중에 루터는 샬베 가족처럼 그 또한 자신이 집례한 첫 번째 미사에 초대할 정도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1501년 본격적인 대학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에어푸르트로 떠날 때까지 소년루터의 지성과 영성의 성장에 필수적인 자양분을 공급해 준 어머니의 도시 아이제나흐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어느덧 장년이 루터의 삶에 또 다른 전환점을 제공한다.


바르트부르그의 기사 융커 외르그(Junker Jorg)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루터의 주장을 심의하고자 보름스에 소집한 제국의회에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고 말하며 소환에 응한다.

보름스에서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철회하기를 담대하게 거부한 결과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제나흐에서 5월 2일에 설교를 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뫼라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5월 4일 숲길에서 기사들에게 납치를 당하여 외가쪽 친지들이 여전히 살고 있던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그 성에 유폐된다. 

이 사건은 당시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고 옹호했던 작센 선제후였던 현인 프리드리히가 황제가 발표한 보름스칙령에 의해 '분열주의자이자 공식적인 이단'으로 정죄된 루터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자 벌인 위장 납치극이었다.

6개월 뒤 루터가 비밀리에 비텐베르크를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바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전체를 뒤덮은 수염을 기르며 성 관리인 한스 폰 베어렙쉬의 보호아래 융커 외르그 란 이름의 기사신분으로 철저하게 위장한 채 칩거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수도사로 살던 루터에게 복장뿐만 아니라 승마와 사냥을 비롯한 바르트부르그성의 기사생활은 그를 여러모로 불편하게 했으며, 스팔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시련을 주셨고 그로 인해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로. 변비와 두통을 비롯한 육체적인 질병과 오늘날까지 잉크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으로 인한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신원이 발각될 위험과 심신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점화된 종교개혁의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그곳에서도 종교개혁의 대의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있던 이들과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하는 일을 지속해야만 했다.

특히 그가 바르트부르그에 머물러야 했던 시기에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이전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함께 토론자로 나선 칼슈타트가 수도원개혁과 성직자의 혼인문제 등에 대해 쓴 논문들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멜랑히톤이 보내온 종교개혁의 신학을 최초로 정리한 '신학의 일반적인 기본개념(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의 초고를 검토했다.

하지만 이 시기 그가 행한 여러 작업들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일은 그해 10월에 착수하여 11주 만에 완료한 헬라어 신약성경의 독일어 번역이었으며, 이 번역판은 1522년 9월에 비텐베르크의 크라나흐 인쇄소에서 목판화를 붙인 그림과 함께 출간되었기에 9월 성경(Septembertestament)으로 불리게 된다.

 

공현종 선교사
독일 뮌스터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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