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평화로운 나라

소설 당선작/평화로운 나라

[ 제17회기독신춘문예 ]

박혜진
2017년 01월 11일(수) 10:31
   

정윤이가 죽었다. 자살이라고 했다. 빈소가 마련되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정윤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정윤이의 보호자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비통한 척 하는 꼴을 도저히 볼 용기가 없었다. 장례식장이라고 적힌 건물 앞에서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장례식장에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장례식장이라는 글자는 원인 모를 두려움을 몰고 왔고, 왔다 갔다 하는 검은 옷 무리들을 볼 때마다 죽음이 바로 내 코끝에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검색 창에 '여고생 자살'이라고 쳐 보았다. 전국에서 자살한 여고생들의 사연들이 뉴스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적이 떨어져서, 왕따를 당해서 자살했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정윤이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 우리나라 언론이란 꼭 알려야 할 사실들은 감추고 숨기고 포장하는데 선수였다. 새로운 법안이 탄생함과 동시에 언론의 역할이 마비되었다. 언론들은 동지의 비밀을 지켜주는 사람들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정윤이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연예인들의 연애 소식은 줄줄이 터져 나왔고 신제품을 소개하는 광고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정윤이라는 여고생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허한 침묵만이 공기를 가득 메웠다.

빈소 안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했다. 정윤이의 장례식이지만 정윤이의 친구들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유일한 정윤이의 친구인 내가 참석하지 않았으니, 정윤이의 손님들은 한명도 없는 셈이었다. 장례식에는 정윤이의 법적 부모들의 지인들로만 북적거릴 것이다.

정윤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봤다.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온 것 같았다. 막상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가장 친한 친구 아니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죽은게 맞나 싶을 정도로 덤덤했다.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다시 혼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이후로 줄곧 혼자였던 내 모습 그대로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나 같은 애한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이제 그 어디에도 정윤이처럼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그대로 느끼는 사람은 없다. 정윤이와 나는 쌍둥이처럼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었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상대방이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한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공감하는 척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정윤아, 잘가'

이렇게 정윤이와 빨리 헤어질 줄 알았으면 정윤이가 좋아하는 이름을 실컷 불러줄 걸 그랬다. 정윤이는 하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다. 정윤이라는 이름은 남자 이름 같지만, 하늬라는 이름은 누가 봐도 여성미가 철철 흘러넘친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되어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하늬라는 이름을 딱 두 번 불러줬다. 정윤으로 익숙한 그녀에게 하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왠지 근질거렸다. 

"생일 때 하늬라고 불러줄게."

정윤이가 올해에도 하늬라는 이름을 듣고 하늘로 날아가서 다행이었다. 헤어지고 나면 잘해주지 못했던 일만 생각난다던 어른들의 말이 조금은 맞는 것 같았다. 정윤이한테 더 잘해줄걸, 더 기쁘게 해줄 걸 하는 후회가 정윤이의 빈자리만큼 자리잡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을 쭈욱 내밀며 “오늘 하루 더 하늬라고 불러주면 안 돼? 정윤이라는 이름은 왜 이렇게 정이 안 갈까. 내 이름이 소름끼친다고 느껴 본 적 있어? 난 늘 그렇게 느꼈어.”라고 말하던 정윤이의 표정도 떠올랐다. 어쩌면 '나 죽고 싶어' 라고 미리 내게 알려줬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윤이는 자신의 이름을 지워 버림으로써 가정의 존재 자체를, 보호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정윤이와 내가 친구가 된 그 날은 벚꽃이 흐드러지던 봄날이었다. 여의도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같이 갈 친구는 없었지만 그래도 학교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하던 그 장소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아이들 틈에 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 아이들이 즐겨 한다는 건 전부 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애써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 9호선에서부터 벚꽃 축제의 흥이 느껴졌다.

여의도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건 은지의 영향이 컸다. 은지하고는 중학교 1학년 때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은지는 작년에 갔던 여의도 벚꽃 축제가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지에 대해서 떠들었다. 궁금해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 일어나 은지의 휴대폰을 슬쩍 봤다. 벚꽃이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핀을 꽂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작년 사진이었다.

은지는 은지 책상을 삥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에게 호들갑스럽게 이번 주에 열리는 벚꽃 축제에서 머리핀을 달고 사진을 찍자고 말하고 있었다. 나름 무리에서 유행 선두주자로 불리는 은지가 자신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자체에 아이들은 소위 잘나가는 그룹에 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은지의 책상 주위에 앉아 있던 아이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 표정을 살피려는 듯 했다.

은지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지만 아는 척 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따돌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은지가 보내는 시선은 법을 피해 따돌림이 은근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에 대한 사실이 우리 반에 알려지기 전에는, 은지는 가장 좋은 곳에 나와 같이 가고 싶다고 제일 먼저 내게 말했었다.

이제는 입을 벌리지만 않았지 내가 옆에 있다는 것조차 꺼림칙하다는 걸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척 하면서 내 시선을 끌었다. 멋지게 나이 들었구나 싶을 은지의 아빠, 진주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은지 엄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지, 대부분의 가족사진에서 느껴지는 향기였다.

은지의 엄마, 아빠는 내가 은지와 단짝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중학교 1학년 때 자주 본 적이 있었다.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면서 사건이 밝혀졌다. 그 후로 은지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은지의 엄마,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은지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서 일주일동안 끙끙 앓았던 것은 어쩌면 은지와 멀어진 것보다 은지의 엄마, 아빠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은지는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친구였고, 은지의 엄마 아빠는 내가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고 느꼈던 평범한 부모였다.

혼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은 익숙했지만, 사람이 북적북적 거리는 곳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친구끼리. 끼리끼리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하면서 친밀도를 나타내는 무리 틈에 꼈을 때 내 처지가 몸서리 쳐질 만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중학교 2학년인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벚꽃 축제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내가 봤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혼자 놀기의 달인을 뽑는 프로그램이었다. 그중 최고 랭킹에 도달한 연예인은 50살 노총각이었다. 50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연예인이 혼자서 놀이공원에 놀러간 장면을 보면서 누구의 처지가 더 처량할까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벚꽃 축제에 혼자 구경 간 여고생보단 놀이공원에 홀로 놀러간 50살 연예인의 모습이 더 불쌍해 보일 것 같았다.

국회의사당 역에서 내려 무작정 사람들이 가는 발걸음을 따라갔다. 사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사람들이 흘러가는 대로 걷다보니 음악 소리가 들렸다. 길 건너편에는 하얀색 눈뭉치들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키가 훌쩍 큰 벚꽃 나무들은 녹지 않는 눈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가끔씩 떨어지는 꽃잎들은 마치 꽃비를 연상케 했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내 앞을 걸어가던 여자는 살짝 기울어진 벚꽃 뭉치를 갖고 싶어서인지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있다는 표정으로 여자친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 커플이 지나가고 긴 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가 아까 그 여자친구처럼 팔을 높이 들고 풀쩍풀쩍 뛰었다. 여자의 손가락은 벚꽃나무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여자가 점프를 할 때마다 여자의 옷소매가 내려갔다. 하얀 팔이 드러났고 그 손목에 찍힌 선명한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스티커처럼 보이는 무지개 문신이었다. 난 꽁꽁 싸맸던 옷소매를 슬쩍 걷어 내 것과 비교했다. 똑같았다. 내 손목에 있는 무지개를 내가 확인했을 때 쯤 여자는 드디어 벚꽃뭉치를 얻었다. 벚꽃뭉치를 들고 걸어가는 여자의 표정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분명 기뻐 보였으나 얼굴엔 희미한 웃음자국이 묻어 있었다. 오랫동안 웃지 않았던 사람들이 정말 행복했을 때 보이는 미소였다.

벚꽃 여자를 따라 다닌 건 아니지만, 가는 곳마다 벚꽃 여자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는 페이드아웃 되었고, 꽃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동작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졌다. 벚꽃 여자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벚꽃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의 눈에는 경계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손목에 새겨져 있는 무지개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도 손목을 걷어 내 쪽을 향해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그날 정윤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여름에는 손목에 밴드를 붙이고 다니거나 긴팔을 입고 다녔다. 아무에게도 내 손목에 무지개 문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가릴 때마다 이것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 수백 번 했다. 문신을 제거하러 여러 곳을 찾아 다녔지만 모두들 똑같은 말을 하면서 안 된다고 했다.

"이거 무지개 문신이잖아. 안 돼. 무지개 문신 제거해줬다가 걸리면 그 날로 영업정지에 벌금이야. 얼른 나가."
"아저씨랑 저랑 둘이 비밀로 하면 되잖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정말 비밀로 할게요."
"글쎄 안 된다니까 얼른 나가라."

내가 손목을 가리고 다닐 때마다 아이들은 손목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나름대로 내 손목에 얽힌 사연을 추측 했다. 그중 제일 현실적인 추측이 사실처럼 퍼져 나갔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숨기고 싶어 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손목에는 아주 큰 화상자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크고 흉해서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소문에 대해 모른 척 했다. 내가 묵인할수록 아이들은 내 손목에 있는 그것이 화상자국이라고 확신했다.

차라리 아이들이 떠드는 말처럼 내 손목에 있는 그것이 끔찍한 화상자국이었으면 좋겠다. 화상자국이 내 손목에 남기까지 겪게 되는 고통이 크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육체적인 고통에 비해 적을 것 같았다. 무지개 자국은 내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거라 내 손목에 자리 잡기까지 어느 정도 아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지개 자국을 볼 때마다 손목과 마음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무지개 문신에는 번호가 적혀 있다. 정윤이의 번호는 1번, 나는 5번이었다. 지금은 몇 명의 아이들이 무지개 문신을 갖게 되었을까. 무지개 문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동성애 부부들에게 입양된 아이들이다. 무지개 문신 안에 적혀 있는 번호는 입양된 순서를 의미한다. 즉 정윤이는 동성애 부부의 입양이 법적으로 인정 된 후 첫 번째로 입양된 아이였다. 나는 다섯 번째로 입양되었다.

사람들은 항상 첫 번째를 주목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언론사에서는 정윤이와 정윤이의 가족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정윤이의 부모가 정윤이의 성장앨범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윤이가 자라는 모습은 언론사에서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으로 넘쳐났다. 정윤이는 늘 이 점을 싫어했다. 인터넷에 '동성애' 라고만 입력하여도 정윤이의 사진이 등장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동성애와 관련된 숙제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연을 하나의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현실을 두려워했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입방아에 오르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통과 되었다. 사람들에게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처음 소개 되었을 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었다. 여러 종교 단체에서는 동성애 차별 금지법 법안이 통과 되지 않도록 서명운동을 하거나 시위 집회를 열기도 했다. 아무리 부모 연합이나 종교 단체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 매스컴의 힘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끊임없이 문화계를 장악했고, 사람들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주는 판타지적인 가상공간에 빠져 들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바라본 동성 사랑은 이성 사랑만을 경험한 자들을 흡수해버렸다.

순식간에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었고 동성애 결혼을 인정해주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성애 부부가 탄생하자 동성애 부부의 입양을 허락했다. 동성애 부부의 입양만을 담당하는 단체들도 속속들이 생겨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윤이와 나는 ‘같음 단체’에서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여의도에서 정윤이를 처음 봤던 그 당시에는 항상 짧은 머리를 해왔던 나와 달리 긴 머리를 가진 정윤이의 자태가 매력적이어서 정윤이를 오래도록 쳐다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음 단체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는 어쩌면 갓난아기였던 내 기억 어느 틈에 정윤이의 얼굴이 찍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핏줄이 끌린다는 말이 있듯이, 어린 시절 헤어진 가족들이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듯이 정윤이와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정윤이의 부모와 나의 부모가 '같음 단체'에서 여는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다면 행사장에서 오며가며 마주쳤을 수도 있다.

'같음 단체'에서는 입양 가족들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각 가정으로 그림책을 보내 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성애 입양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같은 성을 가진 부모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이들의 눈에 동성애 입양 가족들의 모습을 각인 시켰다. 같음 단체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친부모에 대한 존재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입양 가족의 경우 아이들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상처 받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엄마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엄마는 너를 마음으로 낳았고, 너를 낳아주신 엄마는 또 계셔. 엄마와 너를 낳아주신 엄마는 똑같이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자라서 너를 예쁘게 낳아주신 엄마가 궁금하다면, 너를 낳아주신 엄마를 만나게 해 줄 거야."

아이들의 귀에 사랑스럽게 속삭여주며 아이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친부모와 양부모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동성애 입양 가정의 경우 일반적인 가정과 다르지 않고, 우리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어색하고 이상해 보이는 것일 뿐 잘못된 것 없이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상처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은 어느 곳에도 없었고, 친부모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있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봤던 그림책은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콩쥐팥쥐', '흥부놀부'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흔하게 읽었던 안데르센의 그림책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접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도서관에 데려가서 읽어야 한다고 알려줬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봤던 그림책은 '많고 적고'와 '엄마아빠'였다. 얼마나 많이 듣고 읽었는지 아직도 글자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림책 '많고 적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다, 적다라는 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많은 것이 있으면, 적은 것도 있지요. 우리 눈앞에 사탕이 있다고 상상해 봐요. 사탕이 우리 눈앞에 몇 개가 있나요? 식탁 한 가득 사탕이 올려져 있으면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외칠 거예요.

"엄마 사탕이 진짜 많아요."
만약 사탕이 식탁 위에 한 개만 놓여 있다면 우린 실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거예요.
"아빠 사탕이 한 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눠 먹을 수가 없어요."


사탕이 적다고 해서 잘못된 일일까요? 여러분은 아니라고 대답할 거예요. 맞아요. 틀린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단지 숫자가 적은 것 뿐 이에요.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가족과 우리 가족의 모습은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닌 다른 거예요. 단순히 많고 적음의 차이예요. 일반적인 가족은 식탁 가득 올려져 있는 사탕처럼 많은 것이며, 우리 가족의 모습은 식탁에 단 한 개뿐이 사탕처럼 적은 것이에요.

그림책 '엄마아빠'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알려 주었다. 여러분 옷장을 열어 볼까요. 머리에 쓰는 모자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어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자를 떠올려 볼까요? 나는 노란색 모자를 갖고 있고, 친한 친구는 분홍색 모자를 갖고 있을 수도 있어요.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 다른가요? 아니에요. 모자의 색깔이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파란색이든 우리는 똑같이 모자라고 불러요. 어떤 집은 엄마 아빠의 성별이 남자와 여자로 다를 수도 있고, 엄마 아빠의 성별이 여자와 여자일 수도 있고, 엄마 아빠의 성별이 남자와 남자일 수도 있어요. 엄마 아빠의 성별이 같거나 다르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 다르지는 않아요. 모자처럼 부르는 이름이 모두 엄마, 아빠로 같아요. 여러분의 엄마 아빠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정윤이와 걸었던 곳들을 홀로 걸었다. 정윤이와 나는 참 잘 맞았다. 좋아하는 음식도, 영화 장르도, 취미도 비슷했다. 그리고 가장 비슷한 점은 집에 들어가길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우리는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도 보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편의점에서 라면도 먹었다. 정윤이와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 아주 오래 된 영화들을 좋아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러브스토리 영화를 자주 보았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는 동성애 커플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정윤이와 나는 일부러 아주 오래 된 영화들을 찾았다. 운이 좋으면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아주 조그마한 상영관을 찾는 날도 있었다. 영화관에서 옛날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대부분의 날들은 시립 도서관을 찾거나 멀티방으로 갔다.

옛날 영화 중에 정윤이는 비비안리가 나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나는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노팅힐'을 가장 좋아했다. 노팅힐을 보면서 안나 스콧과 윌리엄 태커가 사랑을 나누었던 노팅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왠지 노팅힐에 가면 운명적인 사랑의 상대를 만날 것만 같았다. 노팅힐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정윤이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남자들끼리 나누는 사랑만 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누는 일반적인 남녀의 사랑이 궁금했다.

사람들은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을 나누고, 여자와 여자끼리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는 모습을 세련된 문화라고 표현했다. 혹은 사람으로서 마땅하게 누려야 할 권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처음엔 당연히 그들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로부터 그렇게 배웠으니까. 나도 엄마 아빠의 사랑이 담긴 '김이민아'라는 내 이름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아빠의 성을 따라 김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이민아'. 이민아라는 이름에서 '이'는 엄마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성은 김, 이름은 이민아 이지만 사실은 성은 김과 이, 이름이 민아인 셈이었다. 독특한 네 글자 이름과 글자 속에 담긴 의미가 낭만적이고, 엄마 아빠의 절절한 사랑이 느껴진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병원으로 들어간 후부터 결코 세련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세련되지도 낭만적이지도 발전된 것도 아니었다. 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처참했다. 과연 우리는 삶이 무너지고 고통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파멸의 현장까지 가 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앞으로도 영영 가보지 않을, 상관없는 사람일 것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세대가 변했다는 말을 늘 달고 다닌다. 이웃의 정이 사라진지 오래라고들 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속마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않지 못한다. 설령 안다고 한들 그들은 타인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일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걸어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품고 다녔다. 엄마는 현재 말을 잃어버린 상태다. 신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딱 한 마디 말만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엄마는 ‘절대 와서는 안 될 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 공익광고에서 폐암에 걸린 환자가 자신을 죽음의 길로 성큼 인도한 흡연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설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병원에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식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갔을 때 거실과 온 방안은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온 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의 몸은 가끔씩 저절로 대변을 밖으로 내 보낼 때가 있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어야 했고, 손님들이 오는 날이면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똥들을 보면서 이걸 치워야 할까, 그대로 두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이 열렸다. 아빠가 마스크를 쓰고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들어 왔다.

"민아야 잠깐만 나가 있어. 집안 구석구석 병균 투성이야. 소독 좀 꼼꼼하게 해주세요."
아빠는 평소 자신의 몸을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하루 권장량 칼로리를 계산해서 먹었고, 인스턴트식품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내가 피자와 치킨, 파스타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아빠가 출장을 가거나 야근을 할 때 뿐 이었다. 출근 전 매일 한 시간 동안 수영을 했고 비타민을 비롯해 우리 몸에 필요하다는 건강 보조식품을 챙겨 먹었다. 정기적으로 에이즈 검사도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철칙이 있었고 화가 날 때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화가 난 심신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들이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아빠가 사는 방식에 대해 내가 뭐라고 거들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아빠는 감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아빠의 표정에서 기쁘다, 슬프다, 속상하다, 우울하다 등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표출하는 기본적인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유히 집 밖으로 사라졌다. 두꺼운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종교적인 예식을 치르는 사람들처럼 엄숙하고 단정했다. 점심시간에 길에서 흔히 보이는 직장인들의 잡담 섞인 근무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현관 앞에 앉아 있어야 할까. 아빠가 들어오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곧이어 옷을 갈아입은 아빠가 나왔다. 그 사이에 샤워까지 한 모양인지 스킨 냄새와 향수 냄새가 적절하게 뒤 섞여 있었다.

아빠에게 끈끈한 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에게서 나는 향은 아빠의 빈자리, 친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덮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주 가끔은 이런 냄새가 나는 사람이 미래의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빠는 차에 타라고 했다. 목적지는 엄마가 있는 병원이 아닌 보건소였다. 아빠는 차에서 내리기 전 엄마의 병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아빠답게 호들갑스럽지 않았으며 뱅뱅 돌려 말하지도 않았고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설명했다.

아빠와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함께 살았지만 닮은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아빠보다 엄마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보건소 입구로 들어가는 다리가 후들 후들거렸다.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빠는 재빠르게 쫓아오지 못하는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원망이나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을 주지 않는 대신 쓸데없는 간섭이나 조언, 비난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결과는 엄마의 항문기능 장애와 에이즈로 끝이 났다. 엄마 아빠 덕분에 아직 신분증도 나오지 않은 나는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온 집안에 대변을 흘려 놓은 채 그대로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엄마가 그 자리를 채웠다. 집을 떠나기 전 엄마의 마지막 옷차림은 어땠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어떤 마음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엄마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지, 택시를 불러서 택시를 타고 갔는지, 아빠가 병원에 데려다 주었는지조차 몰랐다. 생물학적인 엄마 아빠가 왜 나를 떠났는지 몰랐던 것처럼 집을 나서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도 알 수 없었다. 안방을 차지한 새엄마의 얼굴은 유난히 빤질빤질 광택이 났다. 내게는 어느덧 세 번째 엄마가 생겨났다.

안방의 주인이 여전히 엄마였던 시절, 아빠가 출장을 가거나 회사일로 집을 비우는 날은 축제의 날이었다. 콜라도 마시고, 피자도 먹고. 완전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음식을 남기지 않고 싹싹 먹었으며 근처에 있는 아파트까지 걸어가서 분리수거를 했다. 집안에 피클 한 조각의 흔적조차 남아 있으면 안 되었다. 엄마랑 손을 잡고 분리수거를 하면서 엄마가 이렇게나 듬직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가 아니라 오빠였다면, 내가 입양된 집에 이렇게 친절한 오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엄마가 아빠의 새로운 아내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빠의 부재는 끔찍했다. '내 유일한 소원은 네가 사라지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사랑을 나눌 수 없다. 항문 섹스가 얼마나 황홀한지 너 같은 꼬마 아이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등 미성년자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가슴을 쾅쾅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싶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얼마 전 도덕 시간 이후 친구들은 기체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동성애에 대해 비난하는 발언이 금지되었고, 항문 성행위와 에이즈 감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할 수도 없게 되었다. 도덕 시간이었다. 4단원 ‘차별하지 말아요’를 공부할 때였다. 도덕 선생님이 동성애 커플을 인정해주고, 결혼과 입양 제도까지 받아들인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된 나라이며, 수준 높은 나라인지를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도덕 선생님은 수업을 하면서 침을 멀리까지 내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덕시간에는 힘없고 목소리 작은 아이들이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도덕 선생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일수록 학급에서 미치는 영향이 큰 아이들이었다. 은지는 맨 뒷자리를 매번 지켰다.

"동성애가 에이즈를 일으킨다? 그건 잘못된 상식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인정해주는 법안을 통과 시키려고 할 때, 통과되지 못하도록 반대하던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린 거예요. 난 이 학교에서,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 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이 반에도 동성애 입양 가족이 있죠? 여러분들도 저처럼 행운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직까지는 동성애 입양 가족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그때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분은 선생님 같은데요. 저는 동성애가 에이즈를 일으킨다고 알고 있어요. 저희 외삼촌이 수동 연세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제가 외삼촌을 만나러 병원에 갔다가 직접 봤어요. 그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전부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에 걸린 환자였어요.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의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는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게 올바른 정책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복지 차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을 치료해 주는 게 맞지 않나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의 낯빛이 멍이 든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일어나서 당장 나가! 수업 시간에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니. 너같이 생각이 불순한 애는 공부할 자격이 없어."
결국 우리 반 아이는 등교 10일 정지를 받았고, 아이의 부모는 지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 100만원을 내야했다. 자비로운 선생님, 학생들을 존중하는 선생님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도덕선생님은 그날 아이들 앞에서 교육적이지 않은 발언을 했다는 자책 때문인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은지를 비롯한 아이들은 나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서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가 에이즈에 걸렸으며 아빠가 곧바로 새로운 애인을 집으로 불러 들였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며, 숨기려면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온 피부로 깨달았다. 아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도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어떤 아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거나 식사를 함께 한다고 옮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의사들이 거짓말을 하며 진실을 묻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들의 의식 속에 동성애 차별 금지법은 딴 세상 이야기였으나 우리 반 아이가 등교 정지를 당한 뒤부터 꼭 기억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서 그 아이가 등교정지를 당한 사건이 뜨거운 관심거리가 된 이유는 모든 여자아이들이 한 번씩 마음속으로 애정을 품어봤을 정도로 인기스타였기 때문이다. 일주일동안 우리 반 아니 전교에서 몰려들 정도의 인기스타를 보지 못하는 것은 큰 충격이었으며, 그 충격의 빌미를 제공한 나는 공공의 적이었다. 물론 내 앞에서 내 욕을 하거나 나를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하지는 않았다. 아마 동성애 차별 금지법 때문일 것이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나랑 짝이 된 것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으나, 동성애 차별 금지법도 아이들에게 풍겨져 나오는 쾌쾌한 감정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입을 아무리 틀어막고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빼앗아도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표정과 감정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표정과 감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었다. 신이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걷어갈 수 있는 것도 신뿐이다. 어쩔 수 없이 표정으로 표출되는 불쾌함, 짜증남은 그 어떤 법으로도 적용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아이들이 나에 대해서, 우리 가족에 대해서 어떤 발언을 해도 신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일이 이렇게 벌어지기까지 나는 그 어떤 행동도 선택도 하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날 뿐이었다. 우리 부모는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일을 선택했고, 나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친부모에게 버려지는 걸 원하지도 않았고 동성애 부모가 나의 부모가 되는 일에 찬성하지도 않았고, 친구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가 에이즈를 일으킨다, 나는 동성애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그로 인해서 바른 말을 했던 인기스타가 등교 정지를 당했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에 나는 어떤 콧김조차 불어넣지 못했다. 그러나 감당은 오로지 내 몫이 되었다.

버스를 탔다. 아빠는 해외 출장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아빠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새엄마는 내가 친구를 만나러 잠깐 나갔다거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둘러댈 것이다. 나와 한 공간에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학교에는 새엄마가 전화를 했다. 가족 여행을 간다고 말했다. 내가 자리를 비워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건 그에게는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때 우리 반 인기스타가 말했던 수동 연세 요양 병원을 검색했다. 수동 연세 요양 병원에 대한 기사는 찾기 힘들었다. 수동 연세 요양 병원 홈페이지를 눌렀더니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인터넷 지도에서 수동 연세 요양 병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성현이라는 환자가 입원해 있는지 알 수 있나요?"
최대한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보호자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죄송하지만 환자 개인정보 때문에 우리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지 확인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엄마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 확신 할 수는 없었지만 직감으론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병원에 도착했다. '수동 연세 요양 병원'이라고 적혀 있는 건물이 보였다.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환자를 부축하며 산책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사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오늘 날씨가 엄청 따뜻하네요. 오랜만에 산책 나오니까 좋으시죠? 식사도 잘 하시고, 치료도 잘 받으셔서 산책 더 자주 해요."
간호사가 부축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앙상한 겨울나무 같았다. 오른쪽이 마비되었는지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질질 끌려갔다.
"엄마 까까 언제 줄 거야? 나 까까 먹고 싶은데. 까까 줘. 까까."

환자는 간호사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더 이상 병원 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차라리 엄마가 여기에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정윤이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숨 쉬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혼자 있는 것에 내 육신이 온전히 적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도서관도 편의점도 노래방도 PC방도 가지 않았다. 목적지 없는 길을 걷기도 했고, 번호도 확인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버스를 타기도 했다. 정윤이의 엄마, 아빠가 교문 앞에 있었다. 정윤이의 엄마, 아빠는 내게 아는 척을 했다.

"네가 민아지? 정윤이 물건을 정리하다가 민아에게 전해줄게 있어서 왔어. 정윤이 핸드폰 속에 민아랑 찍은 사진이 많이 들어 있더라고. 좀 서운하더라. 우리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던데. 정윤이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던 건데 그 위에 민아에게 전해 달라고 쪽지가 붙어 있었어."
빨간색 다이어리였다.
"우린 아직도 정윤이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 모르겠어. 눈이 참 맑은 아이였어. 우리 정윤이는. 웃기도 얼마나 잘 웃었는데. 정윤이는 처음 만나는 그날에도 활짝 웃고 있었어.”

정윤이의 부모는 눈치가 없었다. 정윤이가 잘 웃었다고? 그렇게 해맑던 얼굴이 굳어만 갔던 이유가 당신들 때문이며 정윤이가 죽은 이유 역시 당신들 때문이라고, 얼마나 끙끙 고생을 했는지 항상 입술이 터져서 피 묻은 딱지가 늘 입술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당신들이 알기나 아냐고 소리치며 노려보고 싶었다. 솟아 오른 분노가 어른들에게 터져 버릴까봐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정윤이가 떠난 후 한 달 만에 도서관에 갔다. 정윤이의 손때가 묻은 다이어리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정윤이가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계집애. 내가 이토록 외로워 할 것을 알고 자신과 가장 닮은 다이어리를 내게 남긴 모양이었다.

정말 정윤이는 바보다. 내게는 이깟 다이어리보다 정윤이의 체온이 담긴 손짓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나 보다. 정윤이와 함께 영화를 봤던 도서관 8번 자리에서 빨간 다이어리를 펼쳤다. 모니터에는 정윤이가 좋아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다이어리 안에는 나와 헤어지고 공허했던 시간들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감정을 이입했던 정윤이는 이불 속에서 울면서 많은 시간들을 홀로 외로이 보냈던 것 같다. 정윤이가 적었던 여러 편의 일기들은 정윤이의 눈망울에서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자국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톱스타 부부가 일주일 째 인기검색어 1위에 올랐다. A는 아이돌 출신 연기자로 중국, 대만, 일본에 많은 팬들을 두고 있었다. B의 경우 모델을 뽑는 오디션을 통해 텔레비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A는 B보다 9살이 많았다. A는 아이돌 그룹의 원조라고 불릴 정도로, 아이돌 그룹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낸 존재였다. 모든 기획사들이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 낼 때 A가 속한 그룹을 모범 답안으로 선택했다. 현재 A는 영화나 드라마에 틈틈이 얼굴을 내밀면서 A가 지니고 있는 소속사를 키우기에 열중하는 상태였다. B가 나왔던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은 나도 본 적이 있었다. 큰 키에 하얀 얼굴은 여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B가 잘생긴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모델로서 매력이 충분히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특출한 외모로 반짝 인기를 얻고 스크린 밖으로 천천히 사라졌던 많은 연예인들 중 한 명이 되겠구나 싶었다. 네티즌들은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의 1등은 까만 피부에 짙은 눈썹이 떠오르는 K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네티즌들의 추측과는 달리 B가 1등을 거머쥐었다. K의 팬들은 게시판에 항의 글을 올렸으나 공정한 투표와 심사를 거쳐 정해졌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오디션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봤던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 B가 어느 회사 소속이 될지, 정식 데뷔 활동은 무엇이 될지 기대 했다. B는 A의 소속사 연예인이 되었다. 모델 활동으로 첫 데뷔를 장식하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A의 영화감독 데뷔작인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에 사람들은 B가 A의 연인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A쪽에서는 B의 재능을 높게 판단했을 뿐 연인 사이는 아니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몇몇의 네티즌들은 A와 B가 연인 관계임을 증명하는 글들을 올렸고,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재빠르게 보도하기로 소문난 매체에서 둘의 키스 장면이 담긴 기사를 게시했다. 발 뺄 수 없는 증거 앞에 A와 B는 둘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 사실이 밝혀지고 곧 이어 A와 B는 결혼 사실을 발표했다. 언론 매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열애 사실이 공개 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A와 B는 사람들이 둘 사이를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A와 B의 계획 아래에 열애 소식이 터져 나왔을 수도 있다.

A와 B는 결혼 1주년을 맞이하여 아이를 입양하기를 결정했고, '같음 단체'에서 입양 절차를 밟고 있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A와 B의 기자회견을 소개하는 글에는 좋은 일을 많이 한다, A와 B를 부모로 맞이하게 되는 아이는 행운을 타고 났다는 댓글들이 꼬리를 이었다. A와 B가 어떤 아이를 데리고 올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말하는 아이의 행운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었다.

기사를 확인하는 손이 차갑게 식어갔고, 정윤이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윤이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다.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동성애 커플의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를 낼 수는 없으나 문학을 통해서는 충분한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소설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현실을 바꾸는데 이바지한 소설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윤이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다. 정윤이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내가 이루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기사에 댓글을 남겼다. 정윤이와 내가 겪었던 일들을 적으며, 그 아이가 경험하게 될 고통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지, 괜히 소중한 한 아이를 절망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라고 적었다. 댓글은 금방 사라졌다. 그래도 계속해서 댓글을 달았다. 검색 창에 동성애, 동성애 차별 금지법 관련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리고 연관 있는 기사에 모두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윤이가 하늘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의 딸이 된 정윤이의 표정은 꽃같이 활짝 피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경찰서에서, 학교에서, 법원에서 부모님을 찾는 전화가 줄을 이었다. 아빠의 경고를 무시하자 아빠는 내 짐을 몽땅 가방에 쑤셔 박고 나와 짐덩이를 집밖으로 던져 버렸다. 새엄마는 옆에서 속 시원하다는 눈짓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보여주는 작은 손가방을 덜렁 들고 집에서 멀어졌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빠와 기성세대와 지식인들을 상대로 벌였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때 가지고 있었던 내 속에 채워진 힘을 떠올리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정윤이와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죽었다. 병원이 가지고 있는 환자 기록부에는 내가 엄마의 보호자로 적혀 있었다. 18살 두 번째 죽음과 이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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