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국가 정치 (4)정치적 입장에서 본 기독교

한국교회와 국가 정치 (4)정치적 입장에서 본 기독교

[ 특집 ] 민주주의, 냉소보다 참여가 필요

박상훈
2017년 01월 03일(화) 15:15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필자가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연구자'이기는 하지만, 사실 기독교나 기독인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논평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부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불성실한 신자로서나마 그간 지켜보고 생각해 본 것들을 자유롭게 말해도 좋다면, 몇 마디 거들 수는 있겠다.

우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도의 언어'에 대해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 싶다. 

목회자나 장로를 포함해 대부분의 기도문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해 달라는, 일종의 '청원의 언어'가 지배적이다. 그게 꼭 잘못되고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필자가 궁금한 것은 왜 우리 스스로 해보겠다는 '실천의 언어' 혹은 성과를 내고 변화의 가능성을 구현하겠다는 '책임의 언어'는 왜 약할까 하는 점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구원의 기회'가 열린 대사건으로 본다면, 그 다음 문제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렸다'라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런 책임과 실천을 말하고 행동하는 기도가 아니라, 같은 내용의 기도를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색해 보일 때가 많다. 기도가 책임 있는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나날이 새로운 내용을 말하게 되지 않을까? 

더 큰 문제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순종적 자세의 기도'를 마친 다음,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일반 시민들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 보다 더 도덕적으로 문제 많은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는 기독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만약 일요일 전국의 교회에서 발화된 기도가 진짜였다면 아마도 그날 오후부터 최소한 얼마 동안만이라도 선한 삶의 기초가 넓어지고 그 효과가 우리 사회 곳곳에 흘러넘쳤어야 할 텐데, 그런 것을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상투적인 감사의 표현과 함께 용서와 축복을 부탁하는 그런 기도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삶을 정당화시켜 주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좀 우스갯소리 같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같은 내용의 기도를 들으면서 정말 지겨우셨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도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삶을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고민과 얻은 성과를 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가진 슬픈 운명에 대한 위로를 구하고자 했다면 많이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훨씬 더 기쁘게 할 일이지 않을까 싶다. 평생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했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국회의원으로서 책임 있는 실천을 했던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의 저녁 기도('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중에서)를 변용해서 표현하자면 아마 이런 기도가 되지 않을까?

"예수님, 이번 주는 많이 힘듭니다. 기대하고 노력한 만큼 이뤄지지 않은 일들이 많아요. 슬프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도, 그 과정에서 겪게 된 슬픔도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고, 당신이 그런 삶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일은 더 힘을 내볼 생각입니다. 용기 잃지 않게 도와주실 거죠?"

정치라고 하는 인간적 과업을 제대로 하는 일 역시 그렇게 이해되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신은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스스로 다 실현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신비로운 은총을 통해 우리를 이끌면서도 인간의 문제 가운데 대략 절반가량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갖게 했다. 그러한 자유의지에는 신의 뜻과 사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 인식 능력도 있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의 능력도 있으며, 나아가 누군가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야 할 윤리적 책임 의식도 있다. 이 모두는 우리가 이웃을 돕고 공동체를 돌보는 데 필요한 것들이자, 곧 좋은 정치를 상상하게 하는 선한 질료들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을 선용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에 대한 우리 인간의 책임 있는 자세라 생각한다.

정치와 관련해 한국의 기독교는 지나칠 정도로 냉소적인데,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민주주의란 가난한 시민들도 정치에서 평등한 권리를 행사해 좀 더 공정하고 건강한 삶의 기회를 갖는 것을 뜻한다. 정치 밖에서 분노하고 항의하고 화내는 것은 권위주의 때도 가능했다. 민주주의에서라면 달라야 한다. 시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좀 더 좋은 공공 정책을 만들고 이끌어 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민주주의는 그 빛을 잃는다. 정치를 향해 야유하고 부정시하며 개탄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이 되면, 제아무리 민주주의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 인간의 정치 역시 신의 선물이며, 좀 더 나은 정치를 실천하려는 노력 또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생각이 공유되었으면 한다. '기독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라는 논리도 아니고, '기독인이라서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라는 논리도 아닌, 마치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육체의 관계처럼 기독교와 정치 역시 잘 구별되면서도 또 잘 결합될 수 있는 길을 일궈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좋은 정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고뇌와 노력 속에서 신비로운 은총을 기대할 수는 있다고 본다. 인간의 정치를 통해 이상 사회를 만들 수는 없지만, 민주정치를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잘 가꿔 가려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로 격려되었으면 한다. '노예와 이방인 그리고 여자를 위한 종교'에서 출발한 기독교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지해 준 정신적 지주였다. 현대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하나의 권위적 해석만이 용인되었던 중세 가톨릭의 여러 문제들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기도와 은총을 통해 신과 대화할 수 있는 평등하고 자율적인 개인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정당한 권위에 대한 기초를 확립하게 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250년 전 토머스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언명은 현대 기독인들이 잠시 잊고 있던 보석 같은 생각을 말해 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한 권리 가운데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가 있다. 이러한 권리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정부는 피통치자의 동의로부터 자신들의 정당한 권력을 도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해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은 민중의 권리가 된다. 그때 민중은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도록 본래의 원리에 기초를 두면서도 피통치자의 동의에 맞는 방식으로 정당한 권력을 조직할 수 있다."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한 신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정치의 문제는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