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국가 정치 (3)기독교와 정치의 악연

한국교회와 국가 정치 (3)기독교와 정치의 악연

[ 특집 ] 얻은 것은 권력, 잃은 것은 영성

윤경로 장로
2016년 12월 15일(목) 11:25

윤경로 장로
새문안교회ㆍ전 한성대 총장

한국 기독교계의 권력유착 사례는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멀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해방 이후 미군정기 적산불하(敵産拂下) 특혜를 비롯해 이승만 집권기 '기독교 국가'를 세우자는 명분 아래 여러 특혜가 있었던 중 대표적 사례로 '종교법인과 전문 종교인에 대한 면세권 제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계 특히 교계 지도자들의 권력유착의 대표적 사례는 이른바 '대통령조찬기도회'라 하겠다. 한국에서 시행된 대통령조찬기도회는 미국의 국가조찬기도회를 모방으로 출발한다. 미국의 국가조찬기도회는 1932년 미국 시애틀 시에서 기독실업인들이 시 안의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회로 출발부터 기독교계를 매개로 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는 권력유착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미국의 국가조찬기도회를 원용, 한국에서 대통령조찬기도회를 만든 이는 한국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를 창설한 김준곤 목사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국회조찬기도회'로 시작했다. 1965년 2월 시작된 국회조찬기도회는 당시 정치권 여야의 실세들 중 기독인들이 총 망라된 '정치단체'이었다. 출발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이 모임은 곧 '대통령조찬기도회'로 바뀌면서 한층 더 정치화 되었다. 1966년 3월 8일 오전 7시 30분 조선호텔 볼륨에서 첫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첫 대통령조찬기도회에는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를 비롯한 각국 외교사절과 이효상(국회의장), 정일권(국무총리),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 김수환(추기경) 그리고 한경직, 강신명, 유호준 목사를 비롯한 길진경 NCC총무, 최태섭 경제인연합회 부회장, 김활란 이대 총장 등 기독교계 전교단 대표들, 김종필 등 많은 국회의원, 정부요인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치 않은 이유에 관해 분분하지만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날 기도회 설교를 맡은 김준곤 목사는 "박 대통령도 링컨 대통령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빈다"고 설교를 했다. 감리교 측 대표로 나선 김활란은 "모세와 같은 능력으로 민족을 이끌어나갈 지도자에게 지혜의 지팡이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야말로 '대통령 개인을 위한 기도회'였다.

삼부요인을 비롯한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한편에서 이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다. '대통령조찬기도회'란 기독교예배 정신에 역행하는 불순한 의도의 '호화 정치 쇼'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주선한 측에서는 "조찬기도회는 정치행위가 아니다"라면서 "한국 기독교는 (중략) 이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일에 우리가 등한히 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마침내 세상에서 무용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세상권세와의 유착 속내를 드러냈다. 이 기도회를 주도한 김준곤 목사는 대통령조찬기도회의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김종필을 자주 만났고 지속적인 대통령조찬기도회 전담 실무자로 장로 윤인식을 추천,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CCC출신으로 당시 미국유학 중이던 윤남중을 불러들여 총무로 임명, 이후 20여 년간 조찬기도회 일을 보게 하였다.
 
1968년 5월 1일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역시 참석자가 300여 명에 달했는데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해 이효상, 윤치영, 김상곤, 길재호, 정일형 등 여야 중진의원들과 주한 외교사절이 참석했다. 이밖에 참석한 기독교 인사들 중 박대선 연세대 총장이 개회기도를, 노기남 대주교가 구약성서를,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이 신약성서를 낭독하고 김옥길 이대총장이 대통령과 국가지도자를 위한 기도를 했다. 이날 설교를 맡은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키셨기 때문이다"고 한껏 치켜세웠다.

국회조찬기도회로 시작해서 대통령조찬기도회로 변질된 '기도회'는 이후 국가 최고 권력과의 두터운 유착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를 주선한 김준곤의 CCC 복음주의권은 물론 여타 다른 교단과 교회 특히 이 시기부터 대형교회를 지향하던 교회와 교계 지도자들은 박정희 군사정권과 '동거'하며 밀월관계에 빠져들었다. 이후 실시된 '전군의 신자화운동', '가두어 놓고 고기 잡기'에 비유되던 '합동세례식' 등의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1972년 10월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동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에 오르자, 이에 저항한 반유신세력과 진보적 기독교계의 치열한 반유신민주화운동 또한 치열했다. 김재준, 박형규, 장준하, 함석헌 등이 중심이 된 반유신민주화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주류 보수 세력은 유신체제를 지지하였다. 1970년대 접어들며 산업화의 여파로 농촌인구가 서울로 몰려들며 교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대형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독교계 기득권세력은 산업화의 여세를 교회부흥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엄혹한 유신체제 하인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진행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라는 초대형 부흥전도집회는 반유신민주화운동을 희석시키는데 활용됐음은 물론이다. 주 강사 빌리 그래함은 WCC 측을 사회구원론을 주장하는 용공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전미복음주의협의회(NAE) 측에 속한 보수적 부흥사였다. 5일간 진행된 초대형 전도집회에 참가자 연인원은 320만명에 이르렀다 한다. 마치 한국 사회전체를 '기독교 국가'로 바꿀 수 있겠다는 자만심에 들뜨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조찬기도회를 비롯한 이같은 초대형 전도집회를 개최하는 데는 상당한 재정적 후원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과연 그 경비는 누가 어떻게 마련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한국기독실업인회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기독실업인회 전신에 해당하는 기독실업인회는 6.25 전쟁 때 미국의 기독실업인회(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 CBMC)를 본 따 1951년 대구, 경주, 부산 등지에서 시작하여 1967년 전국 규모의 한국기독실업인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의 적극적인 활동은 1970년대 들면서 노사 간의 갈등 특히 산업선교 등 기독교계 노동운동 등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응책이 요구되면서 유신정권과 유착되었다.
한국기독실업인회의 친정권적 어용활동은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박정희 정권 집권기 내내 취약점이던 대미관계를 위해 미국 각계 영향력있는 인사들과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한국 상황을 이해시키는 역할과 직접 미국정계와 재계를 찾아가 반한여론을 무마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교회 특히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의 권력유착 명분과 목표는 '반공'과 '교세확장'이었다. 이는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진 지난 70년 동안 한국교회와 기독교계가 추구한 목표였다. '고백하고 싶지 않은 친일행적',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 '구세주' 같은 미군정기의 시혜, '기독교국가'를 세우려한 이승만 집권기의 권력밀착에 따른 특혜 그리고 박정희 군사정권과 유신독재 하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권력유착의 양태, 이 모든 이면에는 '반공'과 '교세확장'의 대의명분과 목적이 굳게 자리를 틀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해방 후 한국교회의 급성장의 성격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와 기독교라고 하기에는 민망함이 없지 않다. 기독교 '말씀' 특히 그리스도 예수정신에 부합하기보다는 배치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과 이유는 해방과 동시에 갈린 민족분단, 그리고 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인한 '체험적 레드컴플렉스'와 이후 이를 더욱 두텁게 재생산, 확대한 '주입된 레드컴플렉스'의 트라우마 작용이 아닐까 싶다. 기독교 복음과 정신은 어떠한 사상이나 특정한 이념보다 우위적의 가치이다. 종교가 세속적 정치와 유착될 때 결국 그 종교의 고유한 정신 곧 '영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작금 힌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야기되고 있는 여러 세속적 양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향후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다. 이제는 '레드컴플렉스'라는 올무에서 해방될 만큼 국력도 민도도 크게 성장하였다. 이번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통한 '시민명예혁명'은 이를 증명해준다. 한국교회 특히 교계 지도자들은 진정한 복음정신 곧 '예수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내년에 우리는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다.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대학 정문에 게시했던 95개 조항 중 첫 대목이 '회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후에도 한국교회가 이 땅의 시대정신과 지도이념으로서의 기능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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