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 데오(Coram Deo)

코람 데오(Coram Deo)

[ 논단 ]

노치준 목사
2016년 12월 15일(목) 08:23

노치준 목사
광주양림교회


우리는 카메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길을 걸으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가 내 행동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고 있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 모습이 최소한 수백번은 카메라에 담겨진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다 알고 또한 인정한다. 그리고 카메라 때문에 행동을 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는지 인간이 설치한 카메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추해지고 행동이 죄악으로 기울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을 떠날 수도 없고 그 눈길을 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 139:1~4)"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종교적인 것이 도덕적인 것이요 도덕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우리 기독교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면, 즉 코람 데오(神前意識)를 가지지 못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도스토에프스키의 걸작 '악령'의 주인공 '끼릴로프'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인간의 가장 완전한 자유, 곧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증명한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눈길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 주었다. 

청와대에서 시작한 광풍이 온 세상을 흔들고 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모습이다. 세상 사람은 또 그렇다 쳐도, 믿는 자들 가운데에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뿌리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 곧 코람 데오(神前) 의식의 상실이다. 코람 데오 의식을 가지면 창세기의 요셉처럼 죄악의 유혹이 올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 인생길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도 코람 데오의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코람 데오 의식을 가지면 우리는 절망과 좌절을 이길 수 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며, 나는 은혜로우신 여호와 하나님 존전에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질 때 이 놀라운 고백이 가능하다. 낙심하고 있는 마틴 루터 앞에 상복을 입고 나타난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하나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했습니까?"하고 날카롭게 질문했다. 매순간 어디서나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할 때 우리는 절망과 낙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나는 발견했다)'를 외치면서 벌거벗은 채 목욕탕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게 행하는 오만에 물든 세상, 믿음의 눈이 어두워져 엘리사의 사환처럼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있는 인생들, 그 앞에서 우리는 외쳐야 한다. "코람 데오, 코람 데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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