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의 아기 모세들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의 아기 모세들

[ NGO칼럼 ]

현재우 원장
2016년 12월 06일(화) 14:24

안녕하세요! 아동복지양육시설(예전에 널리 쓰인 말로는 보육원 혹은 고아원) 삼동소년촌이란 곳의 촌장(村長)입니다. 또한 아들들만 예순여덟 명을 둔 대가족의 가장입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리 집의 역사사진첩을 펼쳐볼까 합니다.

강변북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보면 한강의 서울지역 마지막 섬 난지도가 보입니다. 지금은 메워져 섬의 흔적은 이제 이름 속에만 남아있는 그곳이 우리 삼동소년촌의 고향입니다. 뭍과 가까워 나룻배를 타면 10여분가량의 시간을 들이면 육지나들이가 비교적 쉬웠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끝 무렵인 1952년 난지도에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이 세워졌습니다. 삼동(三同)은 성 삼위일체를 줄인 말이고 소년촌(少年村)은 그야말로 소년들의 마을이란 뜻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식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할 때에 강위에 자리한 난지도는 한강물이 섬의 토양으로 정수가 되어 파이프만 박으면 물이 넉넉히 흘러나왔고, 너른 섬 들녘엔 온갖 푸성귀가 자라는 낙원이었답니다.

먹는 물과 농작물이 풍성한 그곳의 단점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1970년까지도 밝히고 살았으며, 한강 위에 위치한지라 장마철이면 섬전체가 물에 잠기어 가까운 뭍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기에 1970년 7월에 강 건너 육지로 이사를 나왔고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를 잡고 38년 서울 속의 산골생활(?)을 하다가 지난 2006년 6월 지금의 자리인 서부면허시험장 뒤편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머슴아이들만 생활하는 우리집은 마른 날씨에도 천둥이 칩니다. 우르르 쾅, 쿵쾅. 바로 아이들의 발 천둥소리입니다. 아이들의 조잘거림은 파도소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운 형들이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떠나 조용하고 한가로움만 남은 집을 아가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첫돌을 즈음한 열한 명의 아가들이 요람에 나란히 누워 자고 있습니다. 마치 작은 조각배에 몸을 뉘인 채 쉬고 있는 꼬마 뱃사공들 같습니다. 아니 그 모습은 역청과 송진을 바른 갈대상자에 누인 아기 모세 이야기의 21세기 현실 편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남자아기들의 살해 음모를 피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았지만 먼발치에 떨어져 동생의 안전을 확보한 누이의 보살핌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파라오 공주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삼동의 아가들은 친부모의 피치 못한 사정 때문에 서울 관악구 한 교회에서 마련한 베이비박스를 거쳐 우리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아기들은 서울특별시에서 세운 아동복지센터를 거쳐 서울에 소재한 각 아동양육시설로 보내어집니다. 네모진 베이비박스에서 시작해서 네모진 아기요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마치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영유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으로 친 부모에게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처지가 어쩌면 그리도 흡사할까요! 물론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의 궁전에서 풍족하게 성장을 하였겠지만.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자리 윗녘에는 원래 갈대밭이 있었습니다. 갈대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줍니다. 큰바람이 휘몰아 칠 때면 감싸주고, 스산하고 추운 삭풍이 불어 올 때면 서로 어깨를 맞대어 추위를 이겨냅니다.

우리 아기들도 갈대줄기들처럼 서로 위로하며 체온을 나눠주며 자라날 것입니다. 아기모세처럼 우리 주님께 큰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지켜봐 주시고 도움을 주시며,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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