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살았던 시간과 장소 … 그 현장을 선교사와 함께 순례

루터가 살았던 시간과 장소 … 그 현장을 선교사와 함께 순례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1> - 총회 파송 유럽 선교사들의 보고

허승우 선교사
2016년 10월 26일(수) 10:05
   
 
  • 종교개혁자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에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것을 기점으로 내년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다. 본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두고 총회 파송 독일선교사들을 통해 루터의 유적지를 순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에는 유럽 선교사회가 함께 할 예정이다. 월 1회씩 이어갈 이번 기획을 통해 종교개혁 유적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각 유적지가 담고 있는 현대적 의미 등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편집자주>

 

20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독일교회는 10년 전부터 '루터 2017 위원회'를 만들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표어를 내걸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이 표어를 실천하듯 지난 10월 19일 '루터 성경 2017'을 새롭게 개정하여 출판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대부분의 지역은 옛 동독지역에 있었다. 공산국가였던 동독에 의해 45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종교개혁지들은 독일 통일과 더불어 서독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개신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뜻 깊은 순례지가 되었다.

이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두고, 독일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우리 총회 파송선교사들(16가정 32명의 한인교회 목회자들과 4인의 현지사역자들, 1인의 에큐메니칼 동역자)이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고 경험한 것들을 고국의 교회와 성도님들과 함께 나눔으로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를 풍성히 하고자 한다.  <필자 주>

루터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루터의 생애를 따라 그가 활동한 지역들을 한 곳 한 곳 찾아가는 것이다. 1990년 분단되었던 독일이 하나가 되면서 가장 큰 축복의 하나는 루터의 발자취를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도 이 방법을 따라 직접 순례를 한 후 글을 쓰기로 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기는 루터의 생애와 그가 활동한 개혁지들을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과 함께 생생하게 순례하는 것이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서 구리광산을 운영하는 아버지 한스 루

터와 어머니 마가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는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했고 아들 마틴이 중세의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해 주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1484년 광산업을 위해 만스펠트로 이사했고 루터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후 막데부르크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사춘기의 루터가 1년 동안 머물렀던 신앙 깊은 가정에서 루터는 세속적이었던 친부모들과는 다른 종교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당시에 루터는 처음으로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루터는 1498년 아이제나하로 이주하여 에어푸르트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3년 뒤에 루터는 에어푸르트대학에 입학했고 1505년에 문학석사를 받았다.

같은 해에 루터는 아버지 한스가 바라던 대로 에어푸르트대학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집에서 대학으로 가던 도중 벌판(Stotternheim)에서 갑자기 번개가 치고 마치 지옥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루터는 광산의 수호성인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를 살려주면 수도승이 되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 후 곧바로 루터는 에어푸르트대학이 아닌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1507년 24세의 나이에 에어푸르트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아버지 한스는 불같이 노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흑사병으로 그의 두 아들이 죽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사 루터는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해 극심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루터의 이 영적인 고뇌는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윤리학을 가르쳤고, 1512년에 신학박사가 되어 신학교에서 성서주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다. 이때 테쨀이라고 하는 면죄부 판매상이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를 팔며, 돈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했다. 이 행위는 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 온 루터에게는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 95개 논제를 성안에 있는 성당 북쪽문에 공개적으로 게시했다. 이 날이 바로 중세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개혁을 일으킨 교회 개혁이 시작된 날이며, 새로운 교회가 탄생한 날이기도 했다.

그후 루터는 가톨릭 신학자들(에크, 카제탄)과 논쟁을 해 가며 자기의 신학을 더욱 더 심화시켰다. 루터의 신학은 죄와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것이 복음이고, 이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죽을 때까지 이 신학을 전하기 위해 수 많은 설교와 강의와 편지와 책을 저술했다. 루터의 적은 교황(종교적)과 황제(정치적)였다. 루터는 교황과 황제가 함께 공모하여 소집한 제국의회들(1521년 보름스, 1526년, 1529년 슈파이어, 1530년 아욱스부룩-멜랑히톤이 대신 참석)에서 자신의 신학을 굽히지 않고 용기있게 체계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사제 파문을 당했고(1520년), 황제 칼 5세로부터는 신성로마제국령에서 추방당했다(1521년).

그러나 루터에게는 우호적인 영주들이 있었다. 지혜자 프리드리히 영주가 1521년 추방 당한 루터를 위장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데리고 가 그곳에 머물게 했다. 이곳에서 루터는 역사적인 신약성서 번역을 11주만에 완성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루터가 이룬 가장 위대한 종교개혁적 열매였다. 라틴어로 된 사제들만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일반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죽을 때까지 성서번역과 수정 개정 작업을 했다.

루터는 1525년에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낳았다. 루터는 개인적으로 신장결석증과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러나 자녀들과 아내를 통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다.

1546년 루터는 자기가 태어난 아이스레벤을 방문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고 갑작스럽게 쓰러져 치료를 받던 중 심장마미로 임종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루터의 장례식은 비텐베르크 성안에 있는 교회에서 그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멜랑히톤이 집례했고, 현재 그 성당 제단 양 옆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이 있다.

독일에서 다양한 모습을 사역을 하고 있는 우리 한인선교사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루터가 생명을 내어 놓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깨달은 신학적 진리를 그가 살았던 시간과 장소를 직접 찾아 다니며 새롭게 경험하고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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