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회 총회 주제 해설 ④성서에 나타난 교회 개혁

제101회 총회 주제 해설 ④성서에 나타난 교회 개혁

[ 특집 ] 개혁, 예수님 시점으로의 회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10월 18일(화) 10:06

한국교회사의 어느 시점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벽에 격문을 붙인 시점도 아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거룩의 이미지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영어나 독일어로 종교개혁을 표현할 때 'Reform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종교라는 말은 없다. 개혁이 종교의 맥락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파급은 전 사회의 변화를 몰고 왔다. 루터시대는 그랬다. 예수님이 개혁자라면 종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나아가서 역사 전체를 바꾸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려 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신다. 레위기 19장 2절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의 거룩을 자비의 명령으로 재해석하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라고 하신다. 앞선 43절에서 레위기 19장 18절의 오용을 지적하시는 대목을 보면 그 맥락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레위기 19장의 거룩을 읽으면 세 가지(포용성, 일상성, 총체성) 특징이 두드러진다.

레위기 19장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인용 혹은 반향(echo)되고 있다. 신약학자 존슨(L. T. Johnson)은 야고보서가 레위기 19장 12~18절을 집중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야고보가 말하는 "자유의 법"이 바로 레위기 19장의 "사랑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는 레위기 19장 2절을 직접 인용하고 있는 성경으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거룩함이지, 구원의 은총과 상관없이 외형적 윤리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레위기와 베드로전서에서 공히 거룩함은 나그네에 대한 환대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19장에서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를 강조했다면, 베드로전서의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를 나그네로 규정한다.

청중들의 사회적 자리는 다르지만 그 근본적인 원리에 있어서 레위기와 베드로전서의 신학적 원리는 동일하다. 출애굽은 이제 우리 민족이 권력자가 되어서 이민족을 부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자리만 바꾸는 착취의 악순환이 아니라, 차별과 착취가 사라진, 주인이 나그네를 존중하는 환대(hospitality)의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본래 기독교는 문화적 주변인들의 신앙이었고,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문화적 주도권 상실이 오히려 교회의 교회됨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이다. 

포스트 모던과 함께 온 포스트 크리스텐덤(post Christendom)의 도전은 크리스텐덤 신학의 오랜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기 시작할 때 그것이 세상과의 마찰로 연결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벧전 4:3~4).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고 있으니, 교회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위기의 타개책으로 '거룩'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적합성(relevance)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처음부터 세상이 원하는 것을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우리의 거룩은 세상과 차별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닮겠다는 동기에 의해서 추동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선교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을 "온유와 두려움(혹은 존중)을 갖고(벧전 3:15; 2:17)" 대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중요했던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되었던 베드로전서 2장 9절도 이 거룩 명령의 맥락에 있다. 이는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 출애굽기 19장은 20장에 나오는 십계명 선포의 배경, 혹은 서론 역할을 하는 명령이라 볼 수 있다. 십계명의 수여 이전에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사명 수여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만인제사장'의 원리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이 교회로 옮겨 온 것, 둘째는 이스라엘이 집합적으로 제사장의 사명을 받았다, 셋째는 세상을 향해서 이스라엘의 사명을 전하는 말이다.


모세가 언약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막의 완성을 허락하셨고 그 성막을 자신의 영광으로 채우셨다(출 40장). 언약의 대상인 백성들의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 신실하심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다. 

2017년 총회의 또 다른 핵심구절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거룩의 근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피스티스)과 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피스티스)에서 오는 것이지,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바울은 그의 편지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도(거룩한 이들, 호이 하기오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그 상태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롬 1:7; 고전 1:2)'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명명이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생명의 능력은 '성결(하기오쉬네, 거룩함)의 영'이다. 

복음은 우리가 설명해야 할 교리이기 이전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성결의 영의 능력이며, 오늘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며,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셔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할 능력이다. 거룩의 요구는 문자화된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타인과 차별화하려는 창백한 교리가 아니다. 죽음까지도 이기는 생명의 영이 약동하는 삶이 거룩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저가 또한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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